아오지에서 국군포로와 자녀 200여명 사망한 은폐된 참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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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하 2021.10.03 13:52


오늘 시간엔 국군포로들이 끌려가 강제노역을 한 대표적 탄광으로 알려진 아오지탄광에서 폭발사고가 나 국군포로와 그들의 자식 200여명이 한꺼번에 몰살된 사건을 세상에 알리고자 합니다.

북한에서 국군포로는 살아서는 노예요, 죽어도 전혀 아쉬울 것이 없는 반동들이기 때문에 이 사건은 전혀 알려지지 않고 북에서도 은폐됐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입장에선 마땅히 구출했어야 할, 후손들이 큰 빚을 지고 있는 애국자들이 비참하게 죽은 사건이기 때문에 통일이 돼서도 꼭 진상규명이 이뤄져야 할 사안입니다.

우리가 일제시기 강제징용 문제를 아직도 잊지 않고 다루고 있는 것처럼 비참하게, 이름도 없이 사라진 국군포로들의 문제는 10년이 지나도, 100년이 지나도 꼭 파헤쳐야 합니다. 오늘 방송은 역사에 첫 기록을 남기는 심정으로 제작했습니다. 주성하TV는 구독, 좋아요도 좋지만 끝까지 들어주시면 더욱 힘이 납니다.

아오지탄광 폭발사건에 대한 증언은 지난달 주성하TV에 출연했던 아오지언니, 최금영 씨가 당시 아오지에 살았던 기억을 통해 증언했습니다. 당시 인터뷰를 통해 영상을 만들 수도 있지만, 좀 더 심도있고 임팩트 있게 전하기 위해 제가 증언을 바탕으로 따로 영상을 만들었습니다.

최금영 씨의 진술에 따르면 아오지탄광 폭발사건은 1992년 또는 1993년에 일어났다고 합니다. 당시 폭발로 200여명의 작업자들이 굴 안에 매몰됐는데 다시 파내지도 않고 그냥 갱을 폐기했는데 희생자 대다수는 국군포로 및 국군포로의 자식들이라고 합니다. 알다시피 국군포로의 자식은 탄광 마을을 벗어나지 못하고 역시 탄광 노동자가 됩니다.

이 사고로 인해 당시 아오지에는 수많은 과부들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최금영 씨가 다니던 학교 선생의 남편도 죽었는데, 이 일로 선생이 괴로워하며 금영 씨의 집에서 찾아와 울다가 술을 마시게 됐고, 이후 계속 찾아와 술을 좀 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 사고를 기억하는 아오지 출신 탈북민들이 있으면 제 유튜브에 있는 이메일 주소로 제보를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폭발이 사고였는지 아니면 누구의 의도적인 폭파였는지 등은 알기 어렵겠지만, 당시 희생자 규모나 이후 사건 처리 등은 한국에 매우 중요한 기록이기 때문에 증언해주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거의 30년 전 사건이라 목격자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기록을 남겨야 합니다. 그 기록에 의거해 우리는 나중에 북한 정권의 악행을 단죄할 수 있는 겁니다. 저도 앞으로 아오지 출신 탈북민을 만나면 이 사건에 대해 계속 조사하겠습니다.

우리에겐 아오지탄광이라 알려져 있지만, 사실 아오지엔 두 개의 탄광이 있습니다. 국군포로가 제일 많은 탄광은 오봉탄광이었고, 이 주변에 6.13탄광이라고 있습니다. 6.13이란 명칭은 김정일이 다녀간 날을 따서 지었다고 합니다.

이곳 탄광은 땅 속 500m 넘는 지점에 있는 수직갱 탄광입니다. 수직갱으로 케지라고 불리는 전차를 타고 들어가면 110m 지점에서 한번 멈추고 다시 317m에서 멈추고 다시 내려가 412m에서 멈추고 512m까지 들어간다고 합니다.

우리가 고산지대에 올라가면 귀가 멍해지는데, 땅속 깊이 들어가면 그런 현상이 더 심한 것 같습니다. 케지에 25명이 타는데, 300m를 넘으면 사람들이 귀를 막고 침을 넘기면서 들어가야 한다고 합니다. 이건 이곳에서 노동자로 일했던 탈북여성이 2007년에 자유북한방송과 인터뷰를 한 내용입니다.

이 여성은 케지 추락사고가 나면 국군포로 중에 희생양을 찾아 적의 임무를 받고 고의로 사고를 일으킨 것이라고 조작한 뒤 국군포로를 정치범으로 끌고 갔다고 하는데, 자기 동네에 사는 국군포로 4명이 다 그렇게 잡혀 갔다고 증언했습니다.

아오지의 탄광에는 약 500여명의 국군포로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국군포로라고 불리지 않고 ‘143호’ 또는 ‘43호’라고 불렸습니다. 북한이 전후 내각결정 143호를 발표해 강제수용소에 있던 국군포로들을 사회의 탄광에 보냈기 때문에 붙은 명칭입니다.

143호 대상은 현지에서도 누구도 동정하지 않는 가장 불우한 사람의 대명사였습니다. 아오지에는 북한 죄수들도 왔는데, 죄수는 죽으면 원인규명이라도 있지만 국군포로는 아무 규명도 필요없다고 합니다. 북한 범죄자들보다 더 비참한 존재였던 것입니다.

아오지에서 탈출한 국군포로 허재석 선생이 2008년에 쓴 수기 ‘내 이름은 똥간나 새끼였다’에 따르면 “지하 4000m 탄광 막장에 들어가면 심장이 줄어들고 숨도 가빴다. 끝나면 집에서 땔 석탄을 메고 지하 경사도를 따라 2∼3시간을 걸어야 굴 밖으로 나왔다”고 합니다. 수직으로 500미터 이상이니 경사도를 따라 걸으면 4000미터가 넘어 2~3시간이 걸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오지탄광에서 200여명이 죽은 폭발사고는 규모가 아주 큰 것이지만 그 이전에도 폭발사고가 여러 번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허 선생의 기억에 따르면 1958년 8월 아오지탄광 용연 청년갱에서 폭발사고가 나서 39명이 사망했고 사망자의 몇 배가 되는 화상자가 발생했다고 합니다.

아오지탄광에는 메탄가스가 많이 발생하는데, 이것이 터져 사고가 났다고 합니다. 하지만 북한에선 꼭 이런 폭발을 간첩의 소행이라고 몰아갑니다. 이때 사고로 백남운이라는 국군포로가 체포됐는데 담뱃불을 잘못 버려 폭발했다며 몇 달 뒤 공개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고 합니다.

최인규라는 국군포로는 탄차를 갱으로 밀고 가던 도중, 탄차가 갱도 버팀목을 치는 바람에 갱의 일부가 무너지는 사고를 냈는데, 최 씨는 ‘부주의로 국가에 막대한 손실을 주었다’는 죄목으로 징역 3년을 살았다고 합니다. 가다가 탄차가 갱도 버팀목에 부딪칠 수 있지 그것도 꼭 정권에 불만을 품은 불순분자의 소행으로 간주하는 것이 바로 아오지입니다.

또한 1961년 아오지 탄광 회암 2갱에서 메탄가스가 폭발하여 11명이 사망했고, 이때 최양희라는 이름의 국군포로가 사라졌습니다. 1985년 7월, 밤 12시경에는 막장의 석탄에 자연발화로 불이 붙어 석탄이 쏟아져 내리면서 굴이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했고, 사고로 30분 동안에 40명이 질식해 죽었다고 합니다.

이때는 국군포로들의 자식들이 많이 변을 당했다고 합니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엔 국군포로들이 나이가 들어 은퇴했던 경우가 많았고, 그 이후부터는 국군포로의 자식들을 탄부로 투입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아오지탄광 등 북한 탄광에는 국군포로 외에 소위 의용군 출신이 많습니다. 의용군이란 6.25전쟁 때 북한군에서 싸운 한국 출신들을 말하는데 자원자도 있었겠지만 강제로 끌려간 사람들이 더 많았겠죠.

북한은 남쪽 출신을 믿지 않기 때문에 1956년 6월 의용군 출신 8만 명을 한꺼번에 제대시켜 탄광 등 가장 힘든 지역에 보냈습니다. 그렇지만 의용군은 그래도 북한군에서 싸웠다고 국군포로처럼 학대하지 않았습니다.

국군포로 출신으로 1994년 최초로 탈북해 한국으로 넘어온 조창호 중위에 의해 탄광에 끌려간 국군포로들의 생활이 폭로가 되고, 또 이후 여러 국군포로들이 탈북을 시도하자 이후 북한은 보위지도원들을 동원해 국군포로들을 엄격하게 감시하게 했습니다.

탄광에서 배급을 줄때면 다른 사람들은 한번에 다 주는데 국군포로들은 보위지도원이 사람을 시켜 매일 먹을 치만 갖다 주는데, 이는 집에 있는지 매일 확인을 하기 위한 차원이었습니다. 아오지에서 일어났던 일들, 그 증언들은 우리 정부가 특별히 따로 관리하고 모아야 할 기록입니다. 그런데 어느 정권에서도 이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방치했고 산발적인 증언만 남은 상태인 것 같습니다.

지금은 통일부에 북한인권기록센터라고 있는데, 국군포로와 관련된 증언은 따로 철저히 모아놓기를 촉구합니다. 이걸 하지 않는다는 것은 정부의 책임을 방기하는 범죄입니다. 이상 오늘은 아오지탄광에서 벌어진 200명 이상이 사망한 참사와 함께 아오지에 끌려간 국군포로들의 비참한 삶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탈북자 10/13 12:18 수정 삭제
보위부 비밀자료에 접근할 수 있어서 읽어본 적 있는데, 50년대인지 60년대였던지 오래전에 정전협정때 보내지 않은 미군 포로들이 아오지 탄광쪽에서 일하다가 폭동을 했는데, 수직갱에 몰아넣고 총쏘고 수류탄 뿌려서 학살했다고 적혀있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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