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에서 새 삶을 시작하며
2,968 2 5
주성하 2019.05.08 17:03


1.
지난해 3월, 대한항공의 마크를 단 여객기 한대가 인천공항에 착륙하기 위해 서해바다 상공을 선회하고 있었다. 그 비행기 안에선 한 청년이 둥근 창문 옆에 앉아 새 삶을 시작할 낯선 땅에 시선을 떼지 못하고 앉아 있었다.
 
서해 바다 위에 점점이 펼쳐진 섬들과 숨 막힐 듯이 들어선 건물들, 얼기설기 타래 엮은 듯 늘어진 도로들...

이런 풍경을 보면서 청년은 이 비행기를 타고 인천에서 불과 수십 마일 밖에 떨어져 있지 않는 분단선 위를 날면서 철조망 하나를 사이에 두고 너무나 색다른 풍경이 펼쳐진 남과 북을 동시에 비교해 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윽고 아츠러운 제동음과 함께 활주로를 미끄러지던 비행기는 공항입구에 멈추어서고 그 청년은 이 땅에 내디디는 첫 발걸음에 애써 의미를 부여하며 비행기 밖으로 나왔다.
 
심사대에 가서 북한에서 온 탈북자라 신고한 후 조사기관의 차가 마중 나오고, 2시간 남짓 차를 달려 보초병이 지켜선 한 건물에 들어설 때까지 청년은 쿵쿵 뛰는 심장의 박동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한 우중충한 건물 4층의 희미한 창문가에서 20대의 청년은 멀리 한강변에서 끊임없이 흐르는 불의 흐름을 바라보며 서있었다.
 
미래에 대한 불안은 여전히 가셔지지 않았지만 새로운 세상에 왔다는 마음속 감동이 서서히 현실로 바뀌어가는 순간이었다.

"그래, 나는 이 세상에 다행히도 사나이로 태어났고 어둠 속에 묻혀버릴 운명을 박차고 광휘로운 세상으로 나온 진짜 운 좋은 사람이다. 과거는 버리고 이제부터 새롭게 인생을 써나가야 한다. 열심히 살아서 내가 이 나라에 찾아온 대가를 꼭 찾을 거야."
 
가슴 터질 듯한 격정에 사로잡혀 이날을 기다려 몇 년 동안 묻어두고 살았던 환희의 외침을 세상을 향해 맘껏 터뜨리고픈 청년, 그가 바로 1년 전의 나이다.

2.
 작년 6월 11일, 경기도 안양시의 한 영구임대주택에 먼지를 가득 뒤집어 쓴 갤로퍼 승용차 한대가 멈춰 섰다.
 
그 속에서 자그마한 가방을 손에 쥔 양복 입은 청년이 내렸다. 방금 하나원을 졸업하고 사회에 첫 걸음을 내딛는 나였다. 함께 온 형사와 함께 나는 아파트 관리사무소로 찾아들어가 거주등록을 마치고 집 열쇠를 받았다.

 607호라는 문패가 붙어있는 낯선 출입문 앞에서 형사가 던진 한마디,
 
"이게 이제부터 당신 집이야."
 
순간 나는 온몸으로 전류처럼 찡~하고 흩어가는 전율을 느끼었다.
 
황사가 짙게 낀 뿌연 서안의 하늘...

삐익~하는 소리와 함께 열리는 감옥의 철문...그리고 공안원이 내뱉던 말,

"이게 이제부터 네 감방이다."
 
중국에서 체포되어 감옥에 들어가던 그날이 바로 1년 전 6월 11일이었던 것이다. 그날부터 나는 중국과 북한에서 6개의 감옥을 옮겨 다니며 불안과 절망, 고통과 인내를 체험해야 했다.
 
정치범수용소행을 앞두고 몇 번 씩 자살하고픈 충동, 신체의 파괴가 가져오는 인격 파탄, 인간이 견딜 수 있는 고통의 한계, 생의 소중함 등을 영원히 지울 수 없는 흔적으로 머리 속에 남겼다.
 
그러나 체포된 날로부터 바로 1년이 지난 그날, 나는 대한민국의 국민이 되어 새로운 자신의 보금자리 앞에 서게 되었다.

1년 사이에 나는 운명의 극과 극을 넘어왔던 것이다. 이래서 인생은 얄궃다고 했던가? 인생은 도전하는 용기 있는 자의 것이라는 말이 있다.
 
작년 6월 11일은 주어진 운명에 순종하지 않고 목숨 걸고 도전한 한 인간이 저 멀리 안개 속에 가려진 채 펼쳐져 있던 새로운 운명의 출발선에 서게 된 날인 것이다.
 
사회에 나와 첫 일은 집안에 가득히 쌓여 있는 먼지를 털어 내는 것이었다. 그날은 먼지와 함께 북한에서부터 오랫동안 꾸어오던 새 삶의 출발점에 대한 상상도 훨훨 털어버린 날이기도 했다.
 
텅 빈 자그마한 방안에서 망망대해에 홀로 떨어진 것과 같은 외로움과 두고 온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느끼며 잠 못 이루던 때가 어제 같은데 벌써 1년이 지났다.

3.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어느 덧 1년을 지나보냈다.
 
올해 6월 11일, 어찌 보면 제2의 생일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 날에 자그마한 식당에서 소주잔을 비우며 홀로 지나온 일년을 돌이켜 보았다.
 
그 날만큼은 조용히, 홀로 보내고 싶었다. 작년 그날에도 사람들은 온통 월드컵에 정신이 팔려 들떠서 거리를 돌아다니었는데 내가 식당에 들어간 그날도 한일 축구전 때문에 모두의 관심이 축구경기에 가 있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작년 그날은 승리의 기쁨이 넘쳤다면 올해는 1대0으로 패한 아쉬움을 남겼다는 것이다.
 
그만큼이나 대한민국에서 내가 보낸 일년도 기쁨과 슬픔의 어우러져 교차한 나날들이었다.
 
가장 머리에 남는 에피소드는 처음으로 버스에 탈 때 일이다.
 
버스를 타기 전 다른 사람들이 카드로 삑삑~~긁고 올라타는 것을 눈동냥으로 보면서 "여기서는 돈을 내고 타지 않고 저런 것이 있어야 버스를 타는가"고 생각하며 고민하던 중. 내 눈에 누군가 지갑에서 돈을 꺼내면서 오르는 모습이 띄었다.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아, 돈도 받는 구나."
 
그리고는 당당하게 버스에 올라가 기사아저씨에게 만원을 꺼내 내밀었다. 그러자 기사아저씨가 오히려 당황한 표정을 하더니 "지금 사람 놀리는 거예요?"하면서 알아들을 수 없는 사투리를 투덜투덜 내뱉은 것이었다.
 
순간 나의 얼굴은 홍당무가 됐다.
 
"내가 뭘 잘 못했는가?"
 
그쯤에서 내리고 말 것을 "잔돈을 안 바꾸어줘요?"하고 물어본 게 화근이었다.
 
기사아저씨가 성이 나 "이상한 사람이네. 아~ 오를 때 잔돈을 바꾸어 가지고 올라야지, 당장 내려요"하고 소리 질렀고 버스에 탄 모든 사람들의 시선도 나에게 집중됐다.
 
결국 나는 쫓겨 내려와 정거장에서 멍한 표정을 짓고 분을 삭여야 했다. 그때는 카드를 가지고 타는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카드를 사려고 두리번거렸지만 찾지 못했고 잔돈을 바꾸라던 기사아저씨의 말을 되상기 하고 옆에 있는 소매점에서 천원을 바꾸어가지고 올랐다.
 
그러나 이번에도 사고를 쳤다. 천원을 운전기사에게 내밀었던 것이다. 기사아저씨가 역시 황당한 기색으로 "아, 그 통에다 돈 넣으세요"하는 것이었다.
 
부끄러운 마음에 통에다 돈을 넣고 남 볼세라 급히 뒷자리를 찾아가려는데 운전기사 아저씨가 다시 큰 소리로 부른다.

"앗 뭔가 또 실수한 게 틀림없군"하고 생각하고 얼른 도망치듯 뛰어내릴 준비를 하는데...

"아저씨, 잔돈갖고 가세요."
 
그래서 나는 버스요금이 600원인 줄 알았고 돈 400원을 다시 찾는 줄 알았다. 주위 사람들이 다 나를 이상하게 보는 것 같아 어찌나 창피하던지...

나의 남조선생활은 이렇게 갓난아기 첫 발을 디디듯이 시작됐다.

4.
 처음 나와서 고민한 것은 내가 뭘 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 누구도 나를 찾아주지도, 직업을 소개해 주지도 않았다. 모든 운명을 헤쳐 갈 책임이 나에게 깡그리 얹혀진 것이다.
 
그러나 어디 가서 직업을 찾아야 하는지도,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이 어떤 직종인지도 알 수 없었다. 길가에 있는 생활정보지도 처음엔 무엇인지 몰랐다. 두 달 이 지나서야 그것이 무료로 갖고 가도 되는 것인 줄 알았고, 드디어 방안에서 신문들을 펼쳐들고 구인광고를 보면서 전화를 거는 단계로 진화했다.
 
그리고 마침내 얻은 첫 직업은 군포화물터미널에서 컨테이너에 실린 포도주 박스를 하차하는 일이었다.
 
8월의 땡볕 속에서 컨테이너 내부는 화끈 달아 올라있고 포도주의 발효열까지 겹쳐 땀으로 미역 감아야 했다. 팬티만 입고 하차를 해도 아무도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그곳에서 마음만은 편했다.
 
한국에서 땀 흘려 번 첫 일당, 식비를 제외하고 3만9000원을 받아 쥐고 그렇게도 기쁠 수가 없었다.
 
"내가 이 땅에서 일만 하면 굶어 죽을 염려가 없구나." 일단 한 걱정을 놓은 것이다. 이렇게 두 달 동안 별의별 일을 다 해보았다.
 
노무회사, 홈쇼핑, 전자회사, 국민카드 판촉 보조요원...

특히 판촉을 할 때에는 이마트 복도에 서서 하루에도 수천 명의 고객들에게 미소를 짓고 "어서오세요, 예, 감사합니다"를 하루 종일 연발해야 했다. 말투가 이상하다고 여길까봐 그 두 마디 외에는 별로 말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 두 달 간은 북한에서 장군님의 전사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학생들에게 가르치던 내가 남한에서 국민으로 사는 법을 어깨에 멍이 들면서 새롭게 배우는 과정이었다.
 
이렇게 두 달을 보내자 나는 한국생활에 자신이 생겼다.
 
한 단계 더 진화된 나는 이번에는 인터넷의 구인사이트를 뒤적이는 법을 자체로 배웠고, 직접 쓴 소개서와 경력을 무역회사 20여 군데에 보냈다. 3곳에서 회답이 왔을 때 정말 기뻤다.
 
더욱 기쁜 것은 맨 처음 찾아가 면접을 보았던 집 근처의 회사에 당당히 합격된 것이었다.
 
물론 중국어와 영어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두 달 전 컨테이너 박스에서 땀을 동이채로 흘리던 일당직 근로자가 이제는 사무실에 앉아 해외의 15개 회사에서 팩스로 보내오는 무역결제서류를 취급하는 화이트 컬러로 변신한 것이다.
 
월급도 일당 직보다 단번에 두 배로 뛰어 올랐다. 그러나 이런 생활에 한달 정도 익숙해지고 편안해질 무렵, 나는 머리 속에 끝없이 밀려드는 자문자답에 시달려야 했다.
 
"내가 돈을 벌기 위해 모든 영달을 포기하고 한국에 온 것인가? 통일되면 장사하는 방법밖에 배우지 못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가?

과연 북한으로 돌아가는 그날, 굶주리고 헐벗은 동포들을 외면하고 돈을 벌기 위해 살았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지금부터라도 길을 옳게 잡고 내 고향이자 혈육들이 사는 북한을 위해 조금이라도 이바지 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마음속에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을 품고 계속 일할 수는 없었다. 결국 한달 만에 한 회사의 무역담당 대리라는 자리를 그만두고 일을 해도 내 고향과 동포와 관련된 일을 하려는 결심아래 **신문 기자로 입사해 일했다.
 
물론 회사에서 일할 때보다 무척이나 힘들고 대우도 좋지 않았다. 밤이면 12시가 넘어서야 집에 들어가기가 보통이다. 그러나 나는 이 생활이 좋다.
 
한 몸 편안히 지내거나 또는 돈벌기에만 급급 한다면 그건 두고 온 고향과 가족에 대한 배신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크지는 않아도 남한에서 탈북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북한의 실상을 알려주는 이 일에서 나는 자그마한 보람을 느낀다.
 
이러한 삶의 희열은 돈을 버는 낙과는 결코 바꿀 수 없는 것이며 이것이 독재의 마수를 벗어난 한 탈북자가 조국을 위해 바칠 수 있는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또 이것이 굶어 죽어간 수백만의 영혼이 구천에 떠도는 저 북한의 진실을 알지 못하고 도리어 독재자를 찬양하는 목소리가 날로 높아지는 남한에서, 눈물겹고 가냘프게 지만 마지막까지 부둥켜안고 있어야 할 북한 엘리트의 양심이라고 생각한다.
 
남과 북이 하나 되는 날, 아니, 통일은 비록 되지 않아도 탈북자들이 당당하게 북한으로 돌아갈 수 있는 그 날이 오면 나는 누구보다 먼저 북한에 돌아 갈 것이며 내가 체험한 자유와 민주주의의 단 맛을 북한인민들과 함께 나누도록 하는데 여생을 걸 것이다.
 
그리고 그날까지 나는 모든 사랑과 고뇌를 북한에 남기고 온 나의 혈육과 친구들, 고향사람들과 함께 하며 살아갈 것이다.

-2003년 7월- 주성하

새 사이트를 시작하면서 과거 썼던 글 중에서 기억에 남는 글들을 이곳에 옮겨오려 합니다. 이 글은 한국 생활 1년 뒤, 2003년에 썼던 글입니다. 미국의 소리방송 수필 공모전에 보냈던 이 글은 1등에 당선돼 상으로 그해 12월 미국 워싱턴을 10일 동안 방문했습니다. 워싱턴에서 인터넷으로 3달 전 지원했던 동아일보 기자직 입사 합격자 명단에 제 이름이 들어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이 글을 인터넷에 다시 올려보며 제가 그때의 초심으로 지금도 살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됩니다. 이 글을 쓰던 2003년에 저는 16년 뒤인 2019년에도 제가 고향에 갈 날이 아득한 상황이 될 줄 상상도 못했습니다.

   
임종훈 05/09 09:11 수정 삭제
굉장히 큰 비장함이 묻어나는 글이네요.
주기자님 이제는 그많은 짐을 내려놓으세요.
그동안 충분히 많은 일을 하셨습니다.
댓글달기
정의립 05/13 21:39 수정 삭제
새로 개설하셨군요..축하드립니다.저번 블로그에서도 주기자님글빼곤 안봐서 상관없긴하지만, 더 깔끔해져서 보기 좋습니다. 일단 오랜시간 생생한 북한 이야기를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이제야 말씀 드립니다..한참 궁금하고 잘모르고 환상도 갖던 시기에 진짜 북한분이 담담하게 이야기 해주는 실상은..북한도 사람사는데구나 와 어릴때 반공교육 받을때 배웠던것보다 더 처참하네 였습니다. 많이 배웠고 앞으로도 계속 좋은말씀 부탁드립니다
댓글달기
정광운 05/18 13:32 수정 삭제
참으로 길고도 짧은 시간입니다. 남에서 아무리 오래 살아도 어린시절의 기억은 결코 지금보다 짧게 느껴질리 없을거라 생각 합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보낸시간들조차 고향으로 가기위한 여정인것 같아 마음이 애잔하네요
댓글달기
박혜연 01/22 21:47 수정 삭제
남북통일을 위하여~~!!!! 주성하 기자님, 화이팅~!!!! ^^
댓글달기
박혜연 01/28 11:33 수정 삭제
앞으로 우리나라에서 탈북자 적응기간인 하나원도 북한이탈주민지원센터 즉 국정원합심센터도 폐쇄되어 없어질지도 몰라요~!!!! 그이유는 우리나라에 오는 탈북자수가 감소되니깐요~!!!!!
댓글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