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을 함께 했던 김일성대 동지들에게
2,417 1 2
주성하 2019.06.18 14:59


이제는 우리가 헤어진 지 10년도 더 지났구나. 친구들, 아니 동지(同志)들아.오늘 아침 북한에서 3대 부자 세습이 공식 확인됐다는 기사를 읽는 순간 가장 먼저 너희 생각이 났다.

함께 뜻을 모으던 옛일들이 떠올라 지금은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는 우리의 운명이 새삼스레 더욱 가슴이 아팠다.

마침 4일은 중국 베이징(北京)대 학생들이 주축이 됐던 톈안먼(天安門) 민주화 운동 20주년이 되는 날이구나. 아마 우리의 고민도 그 무렵부터 시작되지 않았나 싶다.

김일성대 정문. 김일성종합대학이라는 현판은 김정일이 직접 써준 것이다.

A야. 시국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내가 너에게 처음 던졌던 말을 기억하니?

"넌 우리 사회를 어떻게 생각하니"였어.

지금 고백하지만 난 그 말 한마디를 건네기 위해 너를 3년 동안이나 지켜봤다.

북한에서 인간적으로 아무리 가까워도 이런 말은 쉽지 않지.

너도 알다시피 이 말을 하는 순간 상대에게 자신의 목숨을 맡긴다는 의미니까 말이다.

내 말이 국가보위부에 들어가는 순간 나는 "최고 정치교육을 받고 있는 놈이 우리 정치제도에 의문을 품었다"는 죄목만으로 정치범이 될 것이 뻔했으니까.

남쪽에서 아일랜드라는 영화를 봤다. 사는 곳을 천국이라고 주입받은 복제인간들이 그 사실에 의문을 품자마자 죽임을 당하는 미국 영화야. 이 영화를 보면서 그때를 떠올렸어.

착한 너는 그때 나의 신뢰를 저버리지 않고 나를 고발하지 않았지. 대신 내 생각을 돌리겠다고 무진 애를 썼지. 장군님을 믿고 따르면 좋은 시대가 올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네가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는지 궁금하다.

A야. 너도 모르는 게 있었어. 당시 너도 잘 아는 다른 내 친구 중엔 함께 반체제 비밀조직 결성을 시도하던 이들이 다섯 명이나 있었다는 사실을.

당시 김일성대 인근 벤치엔 도청장치가 숨겨져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었지. 속 터놓고 말할 곳을 찾던 우리는 지금은 금수산기념궁전으로 변한, 가로등이 환한 주석궁 앞 거리를 오가며 날이 새도록 우리 조국(북한)의 미래를 논했지.

그 헤아릴 수 없는 숱한 밤들....

굶주림에 피골상접해 숨져가는 동포들 모습에 누구보다 가슴아파했던 B야,
너는 어느 날 "이 사회를 더는 두고 볼 수 없어 투쟁의 불씨가 되겠다"며 김일성대 2호 청사 22층에서 삐라(전단)를 뿌리고 분신 자결하겠다고 했어.

파란 지붕이 본관이고 그 옆 높은 건물이 2호 청사이다. 1960년대 김정일이 공부했다는 본관에는 지금은 대학 총장실, 행정실 등이 있고 2호 청사에는 밑으로부터 순서대로 수학부, 법학, 경제, 역사, 철학, 조선어문, 외국어문학부들이 자리잡고 있다.

난 그때 밤새도록 너를 설득해야 했지. "무서워서 누가 네가 뿌린 삐라를 감히 주어볼 수 있겠니. 필요 없는 짓이다. 8촌까지 멸족당할 게 뻔한 여기서 가족을 먼저 생각하자. 북한이라는 수용소에서 헛된 죽음을 맞는 대신 밖으로 뛰쳐나가 수용소 사람들을 구출하는 투사가 되자"고 설득했었지.

그런데 결국 나 혼자 남한에 왔어. 너는 지금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라는 불안감이 자꾸 든다. 김일성대 출신이 처형되는 경우엔 주민들에게 나쁜 영향을 준다며 공개총살이 아닌 비밀 처형된다는 것은 들은 바 있어. 어떻게든 살아있길...

너를 생각하면 혼자 살아남은 자의 비애가 가슴을 찌른다. 아우슈비츠에 끌려갔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유대인 빅터 프랭클 박사는 이렇게 말했지.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 중에서 정말로 괜찮은 사람들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을"

금서(禁書)를 잘 구해오던 C도 생각이 난.다. 북한에 100부밖에 출판되지 않은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이틀 밤을 새우며 손으로 베끼면서 처음 접해보는 자본주의 경제학에 매료됐던 때가 생각나.

우리는 자본주의도 꽤 괜찮은 사회라며 우리 조국의 사회주의가 갖는 모순에 대해 밤새 토론했지. 일반인도 구경하기 힘든 달러를 흔들어대며 여자들을 유혹하고 다니던 고위 간부들의 자식과 지방 어디서나 볼 수 있던 굶어 죽어가는 꽃제비들을 목격하고는 너는 가슴을 쳤지.

김일성대 2호 청사 앞. 나무가 우거진 앞 도로가 주석궁으로 들어가는 도로고, 멀리 산이 아미산이다. 그 아래 국가안전보위부와 보위사령부, 외국어대 등이 있다.

넌 "가족까지 버리며 목숨 바칠 용기는 없다"며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조용히 체제에 순응해 사는 길을 택했었지.

그리고 D동지. 엘리트 군인으로 10년을 바치고 대학에 왔었죠. 나이가 많아 우린 D동지라고 불렀었죠.

내가 먼저 접근했던 다른 사람들과 달리 D동지는 "우리 사회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먼저 내게 물었죠. 당신의 현실 인식과 분석에서 많이 배웠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졸업 뒤 최고위급 간부의 사위가 되어 출세의 길에 들어섰죠. 정은의 후계 추대를 계기로 북한 간부들이 충성 경쟁을 벌인다고 들었습니다.

D동지는 역시 앞장서고 있나요. 늘 뛰어난 분이었으니깐. 자식에게 자랑스러운 아버지가 됐을 지금은 가슴 속에 과거의 고뇌를 묻고 있나요, 아니면 버리셨나요?

친구들아. 당시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고뇌는 입으로는 인민이란 말을 달고 살면서 실제로는 사실상의 봉건왕조인 정권이 얼마나 지속될까 하는 답답함이었지. 그러면서 "사회주의가 과연 인민을 위한 이상적인 사회냐"하는 고민을 했었다.

함께 고뇌했던 우리가 지금은 세 갈래 길로 갈려 걷게 됐구나. 누구는 충성계층으로, 누구는 방관자로, 그리고 나는 반항의 길로... 탈북을 반항이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다.

난 늘 우리 마음에 공통분모가 있었던 그때가 그립구나. 밤을 새우고 아침엔 씩씩하게 강의실에 올라가는 열혈청년이었던 그 시절이 다시 돌아온다면....

남한 사람들은 내게 "북한엔 왜 봉기가 일어나지 않느냐"고 묻는다. 자유민주주의를 마음껏 누리며 사는 사람들이니 세계 유일의 세습체제를 견디는 인민들이 이해되지 않는 것이겠지. 그런 질문들은 참아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목숨 바쳐 민주주의를 성취했는데 북한은 바보들이 사는 곳 아니냐"며 비아냥거리는 말을 들을 때면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단다. 북한 사람들이 흘린 피는 남한보다 100배는 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짐승보다 못한 삶을 사는 수십만 명의 정치범과 체제에 반항했다는 이유로 귀중한 목숨을 잃는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 그들의 희생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누구라도 북한에서 하루만 살아봐도 그런 질문은 할 수 없다. 남한 사람들은 광복 후 소련이 아닌 미국이 진주한 것에, 억울하게 숨지면 이를 써줄 수 있는 언론환경을 가진 것에 감사해야 한다.

적어도 "우리 사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라고 말할 권리는 한번도 박탈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자신이 분신해도 적어도 자신의 가족은 함께 몰살되지 않음에 감사해야 한다.

10여 년 전 우린 김일성 김정일 2대 세습에도 그토록 못 견뎠지. 그런데 지금 3대 세습이란다.

난 너희들에게 "3대 세습이 가능하냐"고 묻고 싶다. 누구나 머릿속에선 도리질하면서 겉으론 충성을 맹세하는 이 현실이 과연 얼마나 오래갈 수 있느냐고 묻고 싶은 것이다.

지금 이 글을 너희는 보지 못하겠지. 북한에서 이 글을 볼 수 있는 선택받은 사람 대다수는 나의 선후배들일 것이다.

지식인이라면, 더구나 한국 언론까지 볼 수 있다면 3대 세습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는 없다고 본다. 두뇌까지 노동당에 맡기고 살 수 없는 일이니까.

내가 평양에 돌아가는 날이면 이 글을 꼭 너희들에게 보여줄 것이다. 그리고 동시대를 살면서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어떤 고민을 함께 했었는지 열띤 토론을 벌이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토론기를 다시 내가 몸담은 동아일보에 싣고 싶다.

-2009년 6월 3일, 서울에서 주성하-
   
Minho Yu 06/19 09:01 수정 삭제
이전 주성하 기자님 블로그에서 이 글을 처음 봤을 때, 넘 가슴이 아팠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지금도 딱히 북한은 변한게 없네요. 아무쪼록 북한 사람들에게도 꼭 자유와 민주주의가 빨리 오기를 빕니다..
댓글달기
독일소년 08/14 00:12 수정 삭제
주기자님의 필력을 느끼게 하는 감동적인 글입니다.
댓글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