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은 보천보에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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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하 2019.06.14 01:48

 
2015년 9월 3일 중국의 항일전쟁 승전 70주년 기념행사에 참가한 박근혜 전 대통령은 베이징(北京) 톈안먼(天安門) 광장 성루에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오른편 두 번째에 섰다.

같은 시각 북한 대표단을 이끌고 행사에 참석했던 최룡해 노동당 비서는 성루 한쪽 구석에서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시 주석과의 면담도 불발되자 최룡해는 그날 오후 귀국길에 올랐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중국 공산당 역사 전문가인 한 중국학자는 몇 년 뒤 사석에서 당시 상황을 소개했다.

"당시 북한은 크게 화가 나 있었다. 항일 승전 기념식인데 함께 일제와 싸운 김일성의 손자는 부르지 않고, 최현의 아들은 홀대하면서 어떻게 일본군 장교의 딸을 환대할 수 있느냐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이는 오래가지 못했다. 중국 당국이 70년 동안 묻어왔던 인물을 슬며시 공개했기 때문이다. 이후 북한은 입을 다물고 아무런 항의도 하지 못했다."
 
중국이 꺼내든 카드는 중국인 왕작주(王作舟) 동북항일연군 2군 6사 참모장이었다. 2군 6사는 1930년대 후반 김일성이 지휘한 부대였다. 왕작주는 김일성 부대 참모장으로서 제갈량 같은 역할을 했다.

길림군관학교 졸업생인 왕작주는 열정만 앞세울 뿐 병법은 전혀 몰랐던 김일성을 대신해 주요 전투 대부분을 지휘했다. 왕작주의 존재가 알려지면 북한에서 선전하는 김일성의 항일투쟁 업적은 크게 훼손될 수밖에 없다.
 
대표적인 게 김일성의 대표적 업적으로 알려진 1937년 6월 4일 발생한 보천보전투 이야기다. 북한은 이 전투가 김일성이 현장에서 진두지휘한 조국진공작전이라며 보천보에 커다란 기념비까지 세웠다.
 
하지만 사실은 다르다. 김일성은 보천보에 오지 않았고, 전투를 기획하고 현장 지휘한 사람은 왕작주였다. 그는 백두산 인근 베개봉 지역에 진출한 최현 부대가 일본군에 포위되자 베개봉과 적의 거점인 혜산과의 중간지점인 보천보를 공격했다. 배후를 공격당한 일본군은 포위를 풀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실은 중국이 숨겨온 비밀자료들을 30년 이상 추적해 최근 김일성평전(상·중·하)을 완성한 조선족 출신 작가 유순호 씨에 의해 밝혀졌다.

유 작가에 따르면 보천보전투는 왕작주의 지휘를 받은 6사 소속 7퇀 4중대(중대장 오중흡) 70여 명, 8퇀 1중대(중대장 무량본) 30여 명, 기관총소대(소대장 이동학) 10여 명, 여성중대(중대장 박녹금) 10여 명 등 총 130여 명이 참여해 진행됐다.

보천보전투 때 경찰서 습격을 맡았던 중국인 항일열사 무량본(武良本)과 6사 9퇀장 마덕전도 보천보전투를 왕작주가 지휘했다는 회고담을 남겼지만 중국 정부는 이를 감춰왔다.
 
북한에서도 이는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비밀이다. 1967년 보천보전투기념비를 크게 지을 때 보천보전투에 참가했던 강위룡이"보천보에 김일성 장군은 오지 않았다"고 말했다가 숙청될 뻔 했던 일도 있었다.

김일성이 소련에 들어가 1942년에 직접 쓴 항련 제1로군 약사에는 보천보전투가 언급돼 있지 않다. 자신이 한 일도 아닌 데다 별로 대단한 전투라고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북한이 보천보전투에 의미를 두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후반부터다.
 
그럼에도 북한은 김일성이 보천보에서 "조선은 죽지 않았고, 조선의 정신도 살아있다. 원수의 머리 위에 불을 지르라"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고 선전하고 있다.

하지만 이 연설도 중국 공산당 장백현위 서기 권영벽(權永壁)가 노획한 물자를 운반할 사람들에게 한 것이라는 게 유 작가의 설명이다. 권영벽은 1937년 10월 혜산사건 때 검거돼 사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다 광복을 5개월 앞두고 처형됐다.

                                              권영벽과 그가 체포된 장소

왕작주는 1940년 전사했다. 유 작가가 만난 왕작주의 외손녀는 "생전 어머니가 아버지를 죽인 이가 김일성이었다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전투 중 중상을 입은 왕작주가 의식을 잃고 체포돼 이송될 때 김일성이 나타나 총을 쐈다고 한다.
 
보천보전투는 발생 다음날인 1937년 6월 5일 동아일보의 특종보도로 세상에 알려졌다. 일제의 정보 통제가 엄혹했던 시기였지만 매우 자세하고 정확하게 당시 상황을 소개했다.

다만 당시 보도에선 습격 사실과 피해 대상만 밝혔고, 보천보전투의 현장 지휘관에 대한 얘기는 쓰지 못했다. 일제의 감시로 당시엔 정확한 상황을 알아내기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제 보천보전투의 기록을 82년 만에 완벽하게 마무리하고자 한다. 보천보전투는 왕작주가 지휘했다. 김일성은 보천보에 오지 않았다.


보천보전투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은 아래 유튜브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TGdaJUwtlig 
   
우리나라 06/18 22:03 수정 삭제
나무위키의 결정이네요.
증거가 하나라도 필요할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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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김일성은 보천보에 참전하지 않았는가?[편집]

일부 반공주의자들이나 그런 성향의 매체는 김일성 보천보 날조설을 주장한다. 즉 김일성은 보천보에 간 적이 없으며 단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으로서 유순호(기사: 조선일보)등이 있다. 그러나 해당 기사에서 유순호는 중국공산당 비밀 문서고에 김일성이 거짓말을 했음을 입증하는 자료가 있다 라고 했지만, 정작 그 문서가 존재한다는 증거는 유순호의 발언뿐이다. 원본이나 원본을 촬영, 스캔한 사본등이 없다. 즉 내집에 금송아지 수준의 발언에 불과하다. 게다가 유순호는 역사학자가 아니라 조선족 출신 문학가로서 전문 연구자가 아니므로 그의 발언에 신빙성이 없다.

국내 최대의 논문 db 모음집이자 공신력있는 기관인 RISS 에서 보천보, 김일성 등의 검색어를 사용하더라도 공신력있는 연구자의 주장은 존재하지 않으니, 나무위키 토론 합의에 따라 해당 주장은 음모론으로 간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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