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식 시장경제의 중심-장마당의 진화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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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하 2019.08.12 16:55


나는 ‘장마당세대’라는 말을 최초로 만들어낸 사람이다.

북한은 20, 30대 때 겪은 시대적 배경을 중심으로 ‘혁명세대’를 규정해 왔다. 혁명 1세대는 김일성과 함께 빨치산 투쟁을 한 세대, 2세대는 6·25전쟁과 전후 복구를 겪은 세대, 3세대는 1970년대 3대 혁명소조운동을 주도한 세대, 4세대는 1990년대 고난의 행군을 겪은 세대이다. 김정은 시대 개막과 함께 이제 북한에는 5세대가 등장했다.
 
그런데 1∼4세대와 달리 5세대를 지칭하는 용어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한 끝에 이들을 ‘장마당세대’로 정의했다.
 
장마당세대는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후반 무렵 태어난 북한의 청년 세대이다. 국가의 배급망이 붕괴된 후 태어나 고난의 행군 시절에 부모들이 국가가 아닌 장마당에 전적으로 의지해 먹여 살린 세대다.
 
장마당세대의 가장 큰 특징은 급격한 인구 감소와 발육장애이다. 1990년대 중반 북한에 대량 아사사태가 발생해 가장 많이 굶어 죽은 연령대가 바로 1990년대 이후 태어난 이들이다.
 
지금은 학계나 언론계 할 것 없이 김정은 시대의 청년 세대를 장마당세대라고 광범위하게 부른다.

현재 장마당은 북한 주민의 생계를 좌우하는 사실상의 소비 및 유통 시장으로 작용하고 있다. 장마당을 떠나 북한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많은 사람들이 북한 장마당의 시초를 암시장으로 알고 있지만 거슬러 올라가 보면 북한 장마당의 시초는 ‘농민시장’이다. 한국식으로 말하면 농민들의 전통 장인 3일장, 5일장 같은 재래식 시장인데, 북한에서도 정권 수립 초기부터 있었으나 1958년 8월 개인 상업을 폐지하고 국영유통과 협동상업의 형태로 통합하면서 농민시장을 폐쇄했다.

그러나 국영 및 협동상업만으로는 주민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모두 충족하지 못하자 이를 보완하는 차원에서 1964년에 농민시장이 부활한다. 이후 농촌 지역을 중심으로 월 3회 10일장(1, 11, 21일) 형태로 장이 열려왔다.

1984년부터는 공장, 기업소에서 나오는 부산물 등으로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만들어 보급하는 ‘8·3 인민소비품’이 거래되면서 농민시장이 시·군별로 1~2개소씩 생기는 등 전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농민시장이 부활한 이후 자본주의와 개인 이기주의 사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폐쇄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는데, 1969년 김일성이 농민시장의 필요성을 다시 인정함으로써 해소되었다. 이때 북한은 ‘농민시장은 국가가 모든 소비품들을 생산해 공급할 수 있고 공산주의화가 완전히 실현되면 없어진다’고 보았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국가의 배급 체계가 거의 붕괴되고 주민들이 자력으로 살기 위해 장사에 나섬으로써 농민시장은 다시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현재 ‘장마당’이란 이름은 북한 사람들의 구전으로 통용되는 말로만 남아 있고 실제 평양을 포함한 모든 도, 시, 군에서 ‘시장’이라는 간판을 달고 운영되고 있다.

이 글에서도 장마당과 시장이란 말을 섞어서 쓰고 있지만, 결국은 다 같은 말임을 먼저 이야기해둘 필요가 있다.

현재 북한 대학들에서 학생들에게 배워주는 경제학에서는 ‘사회주의 사회에서 시장의 존재’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상품 생산이 있으므로 시장이 역시 있게 된다. 그러나 이 시장은 자본주의 시장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된다. 다시 말해 사회주의 국내 시장은 자본가가 없는 시장으로서 상품시장으로만 남아 있다. 이 시장에서는 가치법칙도 제한된 범위에서만 작용한다. 이 시장은 인민 생활을 체계적으로 높이기 위한 경제적 공간으로 사회주의 국가 활동에 의해 의식적으로 이용된다."

시장을 이렇게 정의해놓으니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북한에서 개인들이 물물 거래를 하는 시장의 존재를 허용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경제학자들은 이러한 시장들이 북한 주민 대부분을 먹고살 수 있게 하고 북한 경제가 그나마 쓰러지지 않게 하는 버팀돌이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북한은 2009년 김정은 체제로 넘어가면서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화폐 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이 시도는 대 실패로 끝났다.

한국으로 망명한 태영호 전 주영 북한대사관 공사는 2009년에 진행됐던 화폐개혁 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대대적인 저항이 일어났다. 상점들이 문을 닫고 시장에서 상품이 없어졌다. 평양시 당 책임비서 김만길이 주민들 앞에서 사과하고 모든 상업 활동을 재개해 달라고 호소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주민들의 반발에 김정일은 크게 놀랐다. 북한 지도자의 한마디에 벌벌 기던 주민들이 집단적으로 저항할 줄은 내다보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김정일은 한 달 만에 박남기 재정경제부장을 간첩으로 몰아 공개처형하고 주민들에게 사과해야 했다.
 
부친의 인생 최대 수모와 실패를 후계자 신분으로 곁에서 지켜봤을 김정은은 “생계를 건드리면 무소불위의 독재자 아버지조차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뼈저린 교훈을 얻었을 것이다.

김정은은 집권 후 시장 통제를 포기했다. 오히려 장마당에 대한 규제를 다시 풀어주고 장려하는 쪽으로 정책 방향을 바꾸었다. 그 결과 북한 시장은 무섭게 커졌고, 그 나름대로 정교하게 분업화됐다.

실제로 무역일꾼들이나 마찬가지로 장마당 돈주(장마당의 자본가를 이렇게 부른다_편집자 주)들도 일정한 정도 이상의 자금을 김일성-김정일 기금이나 각종 지원사업의 명목으로 나라에 바치면 노력영웅 칭호까지 줄 정도로 정치적 평가도 해준다.

<2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