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중가요에 푹 빠진 평양 시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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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하 2019.10.02 18:02


2018년 4월 남측 예술단(단장 윤상)의 공연 ‘봄이 온다’가 평양에서 진행됐다. 13년 만에 평양에서 열린 이 공연에는 조용필, 이선희, 최진희, 윤도현, 백지영, 레드벨벳, 서현, 알리, 정인, 강산에, 김광민 등 한국의 유명 가수들이 대거 참가했다.

김정은은 이설주와 함께 첫 회 공연을 보고 “우리 인민들이 남측의 대중예술에 대한 이해를 깊이하고 진심으로 환호하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벅차고 감동을 금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김정은은 1980년대 잠깐 유행하고 사라진 한국 노래 ‘뒤늦은 후회’을 최진희에게 요청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두 달 뒤인 6월 해외에 파견된 북한 외교관, 무역일꾼들에게 아래와 같은 중앙의 지시가 하달됐다.

“이번에 평양에서 한 남조선 예술단 공연 절대 보거나 들여오지 말 것. 위반 시 엄중히 처벌할 것임.”

북한은 과거와는 달리 이 공연을 북한 주민에게 방영해 주지도 않았다. 김정은은 앞에서 한 외교용 수사와 달리, 뒤에 가서는 한국 대중가요의 위력에 매우 겁을 먹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엄중하게 단속하지만, 남쪽 가수들이 노래를 할 때 입속으로 따라 부르는 북한 주민들의 모습도 간간히 훗날 녹화 방영된 영상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은 어떻게 한국의 대중가요를 알 수 있었을까? 그리고 얼마나 가슴속으로 부르고 또 불러왔던 것일까? 그들의 한국 대중가요 사랑은 어느 정도일까?

김일성대에서 배운 남한 노래들

북한에서 한국 예술은 이미 낯설지 않아진 지 오래다. 내가 북한에서 김일성대를 다닐 때인 1990년대 이미 ‘임을 위한 행진곡’을 배웠다. 대학을 방문하는 전대협 학생들을 연도에서 환영할 때 부르라고 했다.

학내 스피커를 통해 누군가가 선창하는 노래를 한 번, 두 번 합창으로 따라 부를 때 우리는 어느새 이 노래가 지닌 비장함에 물들어 있었다. 김일성대에서 한국 노래를 가르쳐준 것은 그때가 아마 유일할 것이다.

‘아침이슬’은 역시 1990년 평양고사포병부대에서 배웠다. 북한 대학생들은 6개월 동안 의무적으로 대공포부대에서 근무해야 한다.

어느 밤 중앙당 간부의 아들인 명철이가 대공포 상판 위에 올라가 기타를 치며 이 노래를 목청껏 불렀다. 노래는 긴 밤 당직 근무에 시달리던 우리들을 단숨에 전염시켰다. 어느 나라 노래인지 누구도 묻지 않았다.

어떤 날엔 중대 대열 합창으로 ‘아침이슬’을 부르기도 했다. 김정일 호위병 출신도, 장관의 아들도, 보위부 고위 간부 아들도 모두 함께 불렀다.

그리고 2∼3년 뒤 이 노래는 북한 전역에 확산됐다. 북한은 1998년 이 노래를 금지곡으로 정했다. 하지만 지금도 술자리에서 이 노래를 부르는 북한 주민이 적지 않다.

탈북하기 전까지 나는 밤하늘의 어둠을 벗 삼아 ‘임을 위한 행진곡’과 ‘아침이슬’을 조용히 부르곤 했다. 함성도 맹세도 산 자도 존재할 수 없는 그 땅의 긴 밤을 홀로 서러워하며…. 그러다 끝내 그 서러움을 모두 버리고 탈북이라는 목숨 건 거친 광야에 나섰다.

한국에 와서 북한에 전해주고 싶은 노래가 또 생겼다. 수습기자 시절 열흘 넘게 시위 현장을 따라다니며 배운 ‘불나비’란 노래다.

내가 일하는 동아일보사 앞은 시위의 단골 장소다. 때론 퇴근하다 시위대가 합창하는 노랫소리에 끌려 한참을 서서 입속으로 함께 부를 때가 있다.

그때마다 나는 북한에서 벗이 되어주었던 그 밤하늘을 쳐다보며 눈물을 글썽인다. 가슴에 한이 맺혀서다. 아직은 너무나 젊은데, 피가 뜨거운데 정작 아무것도 못 하고 그 땅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억울해서다.

여기가 평양이고, 청와대가 노동당 중앙당 청사이고, 시위대가 평양 시민들이라면….

지금 당장 북에 갈 수 있다면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과 같은 허울뿐인 멍에에 갇혀 노예로 사는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임을 위한 행진곡’과 ‘불나비’를 가르쳐주고 싶다. 동독에서 외쳤던 ‘우리가 인민이다’라는 구호와 함께.

오늘날 이 노래가 가장 필요한 곳은 다름 아닌 북한이다. 진압군과 대치한 평양 시위대의 맨 앞줄에서 다른 이들과 어깨를 겯고 “산 자여 따르라”를 목청껏 부르는 상상을 하면. 오! 내 마음은 터질 것 같다.

북한의 4중, 5중의 감시망이 존재하는 한 그 어떤 시위도 조직될 수 없다는 것은 잘 안다.

설령 어찌어찌해 사람들이 시위대로 변해 거리에 나온다 해도 순식간에 시체 더미로 변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꿈을 꾸는 존재다. 다행히도 난 아직 젊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나 아침이슬이 내가 처음 배운 한국 노래는 아니다.

이미 1980년대 북에선 ‘사랑의 미로’ ‘사랑을 위하여’가 퍼졌다. 물론 가사는 달랐다. 북한 대남공작 부서가 소속 악단인 ‘칠보산전자악단’을 이용해 가사를 고쳐 대남방송을 통해 심리전용으로 보내는 것이라고 했다.

내가 북에서 배웠던 사랑의 미로의 가사는 이러했다.

<그토록 다짐을 했건만/사랑은 알 수 없어요/민주 위해 목숨을 바친/그대를 나는 못 잊어/나의 작은 가슴에 심어준 사랑의 별/언제나 변함없이 영원히/그대의 원한 씻으려/투쟁에 나서리>

그러나 북한 사람들은 가사보다는 멜로디에 빠져 그 노래들을 사랑했다. 1980년대 말에 배웠던 노래 중에는 ‘최진사네 셋째딸’이란 노래도 있었다.

그때엔 연변노래라고 했지만, 나중에 한국에 온 뒤에야 그것이 남쪽 노래인 것을 알았다. 물론 당시 이런 한국 노래들은 연변을 통해 흘러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