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에서 접했던 한국 가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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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하 2019.10.04 18:09


내가 첫 한국 예술을 접했을 때는 198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소문은 바람처럼 빨랐다. 어린 나도 어른들 따라 일찌감치 TV와 마주앉았다. 그때가 1985년 9월이었다.

분단 이후 최초의 ‘이산가족 고향방문단 및 예술공연단’ 교환 방문 행사가 진행됐고, 북한은 이를 생중계했다. 내가 본 첫 남쪽 예술이었다.

그러나 부푼 기대는 이내 바늘에 찔린 풍선처럼 피식 빠졌다. 예술인처럼 보이지 않는 노인들이 느릿느릿한 가야금에 맞춰 이상한 발성으로 목청을 뽑았다.

어머니는 전통 가야금과 판소리라고 말해주었다. 참고로 북한은 1960년대에 가야금을 기존 12현에서 21현으로 개량했고, 판소리는 음악계에서 퇴출시켰다.

난 공연을 보다 잠들었다. 그렇게 졸음을 부르는 음악은 처음이었다. 이후부터 “예술은 북쪽이 훨씬 앞섰다”란 당국의 선전을 확실히 믿었다. 내가 봤으니까.

그러다 1997년 겨울 평양행 열차에서 ‘홀로 아리랑’을 만났다. 당시는 전력난으로 기차가 수백 ㎞를 가는 데 일주일씩 걸렸다. 사람들은 밤이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노래를 부르며 추위와 무료함을 달랬다.

어느 밤. 객차 앞쪽에서 청년의 노랫소리가 들렸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노래와 창법이었다. 사람들은 연방 재청을 외쳤고, 나 역시 그랬다. 전율을 느낄 만큼 좋았다.

탈북해서야 그날 밤 청년이 부른 노래들이 한국 가요였고, 그중 하나가 ‘홀로 아리랑’이란 걸 알았다. 어둠에 얼굴을 숨겼던 그 청년은 노래를 참 잘했다. 그가 어디서 배웠는지는 알 수 없다. 초기에 탈북해 중국에 갔다 온 청년은 아니었을까.

그로부터 20여 년이 흘렀고, 지금은 북한 사람들도 웬만한 한국 노래는 다 안다. 남북 간 예술 교류도 적잖았다. 가장 화려했던 공연은 2005년 8월 조용필 평양 공연이 아니었나 싶다. 공연은 훌륭했다.

그런데 마지막에 ‘홀로 아리랑’을 부르며 조용필은 “함께 불러요. 다 아시죠?”라고 객석에 호소했지만 반응이 없었다. 객석의 7,000여 평양 시민 중 이 노래를 모를 사람은 거의 없었겠지만, 누가 간 크게 호응한단 말인가.

카메라에 비친 얼굴들은 썰렁한 분위기와는 완전히 달랐다. 눈물 가득한 눈은 감동으로 파르르 떨렸고, 입술은 따라 부르고 싶은 욕망을 참느라 오물거렸다. 급기야 마지막엔 몇 명이 조용히 따라 불렀다. 카메라에 잡힌 이들이 보위부에 끌려가지는 않을까 걱정됐다.

예전엔 평양 가는 가수들에게 “당신이 들려주고 싶은 곡이 아니라, 탈북 예술인들과 상의해 그들이 듣고 싶은 곡을 선정했으면 좋겠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중에 이런 생각도 바뀌었다.

가령 2002년 9월 윤도현밴드가 평양에 갔을 때 “저 록(Rock) 버전 아리랑을 북에서 소화할 수 있을까” 우려했다.

하지만 기우였다. 탈북한 평양 청년은 “처량한 줄로만 알았던 아리랑이 저렇게 신나는 노래가 될 수도 있구나 싶어 전율을 느꼈다”고 말했다.

‘너를 보내고’는 북한 국민가요가 되어버렸다. 얼마 전 마이클 잭슨의 공연 영상을 몰래 보고 미치도록 황홀했다는 탈북 예술인도 만났다. 평양은 마이클 잭슨도 소화할 수 있는 것이다.

평양 사람들도 친지끼리 모이면 남한 사람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잘 놀고 잘 춤춘다. 한민족 특유의 음주가무 DNA가 어딜 가겠는가.

평양에서 공연하는 이들은 객석의 무반응에 당황한다. 그러나 아마도 부르르 떨리는 눈동자와 꾹 다문 입술이 그 사람들이 보낼 수 있는 최대의 찬사였을 것이다.

북한에서 1990년대와 2000년대를 청년으로 보낸 사람들은 나처럼 ‘아침이슬’과 ‘너를 보내고’ 같은 노래를 곡과 가사까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당시는 청년들이 술자리에 모이면 이런 노래 하나쯤 불러야 유식한 것으로 보일 때였다. 누구나 그 노래의 출처가 어딘지 알고 있었지만 누구나 말하지 않았다. 그저 불렀고 느꼈다.

2000년대 북한에 인민군 주단 출신의 기타 4병창조라는 것이 등장했다. 김정일 시기 발탁돼 이탈리아 유학까지 했다는 4병창조가 비공개로 진행한 공연이 평양에서 몰래 돌아다녔다.

북한 노래는 물론 이탈리아 명곡까지 기타 4병창과 중창으로 멋지게 각색해낸 공연은 평양의 젊은이들을 유혹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공연 중에 아주 특별한 노래, 몇 번을 들어도 싫지 않은 노래가 있었는데 그 노래 제목이 무엇인지, 어디서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는 누구도 몰랐다. 그저 노래가 하도 좋으니 너도나도 따라 불렀을 뿐이다.

그 노래가 바로 변진섭의 ‘희망사항’이었다. 이 노래는 ‘너를 보내고’를 이어 순식간에 북한 청년들의 히트 가요가 됐다.

이 노래가 하도 널리 퍼지자 이후 4병창조의 공연을 담은 CD 등을 전부 회수, 삭제하라는 당국의 지시가 떨어지고 곧이어 이 4병창조도 해산되었다는 소리도 전해졌다.

북한에서 인기를 모았던 그들의 이후 운명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북에서 이런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대단한 권력자의 승인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4병창조는 기타에 폭 빠져 있는 김정철의 작품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아마 지금쯤 그들은 김정철과 함께 기타를 치며 기쁨조 노릇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아무리 노래 CD을 회수했다고 해도 한번 퍼진 노래는 걷어담을 수가 없다.

‘김치볶음밥을 잘 만드는 여자… 뚱뚱해도 다리가 예뻐서 짧은 치마가 어울리는 여자’라는 가사는 평양 사람들의 마음 한구석에 오늘도 남아 있다.

처녀 총각들이 연애를 하거나 중년들이 “자네 처는 어떤가?” 하는 식의 농을 주고받을 때 ‘김치볶음밥을 잘 만드는 여자’라는 말이 들어간 것도 이때부터다.

이 사건뿐 아니라 북한의 유명무명의 연예인들이 부른 한국 노래가 주민들에게 퍼져 당국이 단속 조치를 취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노래 ‘너를 보내고’나 ‘바위섬’ 같은 것은 모르는 것이 북한에서 모르는 사람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특히 바위섬은 경우는 북한 사람들 대부분이 아예 북한 노래로 알고 있다. 이미 유행에 떨어졌을 뿐, 지금도 술판에서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북한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나는 바위섬을 1990년대 후반에 고등학생이던 아는 동생에게서 배웠다. 그 동생은 훗날 사고로 북에서 사망했다.

생계를 위해 목숨까지 내걸어야 하는 세상에서 너무나 일찍 세상을 뜬 그를 나는 너무 애달프게 회상한다. 그의 얼굴을 떠올리면 진지하게 바위섬을 부르는 표정부터 생각난다.

‘그때 그 사람’이란 노래는 북한이 대작으로 여기는 장편 예술영화 ‘민족과 운명’에도 등장하고, ‘이등병의 노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군에 입대하는 북의 청년들을 바래는 송별회장에서 고정곡으로 지정된 지 오래다.


   
aiueo 10/05 16:30 수정 삭제
북한 주민들은 요즘의 아이돌들의 가요와 80 90년대 순수 한국말 가사와 의미가 있던 시절의 노래 중 어느걸 더 좋아할까요? 물론 80 90년대 노래들도 정말 지금 들어도 세련된 시대를 앞서간 명곡들이 있지만 제 생각에는 역시 가사에 의미가 있고 깊이가 있던 80년대 90년대 노래들을 좋아하지 않을까 싶은데 요즘에도 옛날 노래가 더 좋다고 하는 사람들도 많구요 하지만 사람이란게 또 못보던 모습들을 보면 동경하는 심리가 있는지라 요즘 아이돌들의 노래에 끌릴거 같기도 하구요 어느쪽이든 참 추천해 주고 싶은 노래들이 많은데...중국이 처음 개방하고 2000년대 초반만 해도 한국 노래들을 가져가서 대박을 쳤었는데 아마 북한도 역시 90년대 2000년대 노래들이 인기가 있으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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