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 실시간 시청하는 평양 주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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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하 2019.10.14 12:05


태영호 전 주영 북한대사관 공사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낮에는 ‘김정은 만세’를 외치지만 저녁에는 이불을 쓰고 한국 영화를 보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북한 사람들이 ‘불멸의 이순신’ ‘육룡이 나르샤’ ‘정도전’ ‘징비록’ 같은 것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 애들은 지금 한국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봐서, 말투까지 이제는 한국식으로 변하고 있다”며, “자기야, 오빠야”라는 말투는 바로 그 영향이라고 증언했다.

북한을 취재하는 기자의 시각에서 보면 북한에 한국 드라마가 가장 피크를 이뤘던 시점은 2008년이었다. 그때는 서울에서 어떤 드라마의 3~4부를 방영할 때쯤이면 북한에 1~2부가 들어갔다. 하지만 남쪽에 보수 정권이 오래 집권하면서 북한의 한류는 안타깝게도 급격히 식었다.

그 이유는 크게 세 가지인데 우선 북-중 국경이 급격히 얼어붙어 도강비용이 2008년에 비해 몇 십 배로 뛰었기 때문이다. 밀수꾼이 많아야 알판이든 노래든 많이 북에 들어갈 것인데 비용이 비싸니깐 사람들이 잘 다닐 수 없다.

둘째는 보위부 단속이 심해져서 이제는 한국 드라마를 보거나 유통시키면 무조건 감옥에 가니 과거보다 위험부담이 훨씬 커졌다.

세 번째 이유는 북한 사람들이 한국 드라마를 열심히 봤는데 좀 보다보니 맨날 삼각연애나 하고 내용이 비슷비슷하니 인기가 식었다는 것이다. 몰래 숨어서 봐야 하는데 웬만하면 50부, 60부씩 분량이 엄청나니 그렇게 오래 숨어 볼 바에는 차라리 격술영화나 색정비디오를 보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요즘엔 북한에 들어가는 비디오가 야동과 할리우드 액션 영화가 많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들어가 있는 알판까지 사라질 순 없다.

이것들은 사람들 사이에 돌고 또 돌면서 한류의 명맥을 이어주고 있다. 아무리 장벽을 높게 쌓아도 사람들의 궁금증은 항상 그보다 더 높았다는 것이 역사가 보여주는 진리이다.

CD 녹화기부터 태블릿 PC까지

나는 북한에 동영상을 보내는 사람들을 여럿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을 통해 북한에서 변하는 트렌드를 시시각각 알 수 있다.

요즘은 기술이 발달해서 북에선 USB가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이걸 들여보낼 때는 우선 중국에서 북에 가서 팔 수 있는 컨텐츠를 USB에 넣는다. 그리고 그걸 지운다.

북-중 세관을 통과할 때는 검열을 해도 아무 것도 없다. 그런데 북한 암시장에서 활약하는 ‘기술자’들이 복원 프로그램을 갖고 있어서 들어간 다음에 다시 복원해 낸다고 한다. 몰래 들어간 외부 영상물은 북한 곳곳에 팔려나간다. 이런 것을 들으면 격세지감을 금할 수 없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북에선 비디오테이프 플레이어만 있어도 부잣집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북한에서도 LCD TV, 스마트폰, 태블릿 PC를 어렵지 않게 살 수 있으니 북쪽 사람들은 최근 10여 년 새 30년을 훌쩍 건너뛴 셈이다.

밀려드는 첨단 기기의 홍수 속에 보위부가 수십 년 쌓아왔던 통제 노하우도 물거품처럼 밀려가고 있다.

2000년대 초반 CD 플레이어가 북한에 급속도로 퍼져 한국 드라마를 빠르게 확산시키자 보위부는 집집마다 다니며 CD 플레이어에 검열 딱지를 붙이기에 바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통제가 불가능했다. 급기야 2004년 2월 ‘109상무’라는 불법 동영상 단속 전담 특수 조직을 만들고 더 강도 높은 단속을 들이댔다.

2005년 이후, CD와 USB를 동시에 쓸 수 있는 데다 배터리가 장착되어 전기가 없어도 동영상을 볼 수 있는 ‘노트텔’이 퍼지자 보위부엔 비상이 걸렸다.

참고로 이 노트텔은 중국에서만 널리 쓰이는데, 생기기는 노트북 비슷하게 생겼지만 인터넷을 하기 보단 TV를 보거나 CD나 USB를 꽂아 동영상을 보는 기기다. 가격도 싸서 100달러도 안되는 것이 많고, 또 전기가 잘 오지 않는 북한에선 축전기로 충전시켜 볼 수 있는 기기니 인기가 대단했다.

이것이 사용되니 북한 보위부는 증거를 잡기가 너무 어려워졌다. 사람들은 CD롬엔 북한 영화를 넣고, 한국 영화는 USB를 꽂아 보다가 단속반이 뜨면 USB를 빼서 숨기고 북한 영화를 보았다고 우겨대기 시작한 것이다.

이걸 단속하느라 정신없는 사이 2010년쯤부턴 더 골치 아픈 MP4, MP5라는, 태블릿 PC와 유사한 기기가 새롭게 등장했다. 이 기기에 장착되는 마이크로SD 칩은 영화 수십 편을 저장할 수 있지만 손톱만 한 크기어서 최악의 경우 삼켜버리면 된다.

MP4와 MP5 역시 모두 한국에는 없는 것이라, 몇 년 전 북에서 MP4 좀 사달라는 전화를 받았을 때 이게 뭔 소린지 이해를 못해 한참 고민했다. 둘 다 중국에서 만들어지는 저가형 기기다.

한국에서 영어 학원에서 끼워서 파는 동영상 재생기기 비슷한 것이다. 스마트폰과 태블릿 PC에 익숙한 젊은 세대는 아예 블루투스 기능을 활용해 동영상이나 불륜 소설을 전송해 주고받는다. 단속에 걸릴 것 같으면 삭제해버리면 그만이다.

보위부는 흘러간 과거가 그리울 것이다. 옛날엔 어쩌다 전기가 들어온 아파트 단지에 불시에 쳐들어가 전기 차단기를 내리고 집집마다 뒤지면 됐다. 한국 드라마를 보던 사람들은 멈춘 기기에서 테이프나 CD를 꺼낼 수 없어 꼼짝 못하고 잡혔다.

하지만 지금은 확실한 심증을 갖고 몸수색을 해도 증거물을 찾기 어렵다. 김정은이 스마트폰 생산을 독려하는 세상인지라, 최신 기기를 무작정 빼앗겠다고 선포하기도 쉽지 않다. 그랬다간 보위원의 자식들부터 반동이 될지 모른다.

결국 보위부는 대세에 굴복해 노트텔 사용을 합법으로 인정하고 말았다. 대신 집집마다 다니며 조사한 뒤 승인된 기기만 쓰라고 엄포를 놓았다.

하지만 사람들이 노트텔 2대를 구입해 하나만 승인 받고 하나는 숨겨놓고 몰래 본다면 방법이 딱히 없다는 것쯤은 자기들도 안다. MP5도 지금은 무조건 몰수하지만 나중엔 결국 노트텔처럼 사용이 허용될 것이다.

고위 간부들부터 앞 다퉈 구매하는 LCD TV도 정말 골칫거리다. 평양에서 한국 방송을 직접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평양에서 살다 온 탈북자는 한국 방송을 집에서 봤다고 했다. 보위부 전파감독국 사람들은 남쪽에서 강한 출력으로 TV 전파를 쏘고 있어 막기 어렵다고 하소연한단다.

북한은 평양 주변에 안테나를 여러 곳에 세우고 시내를 향해 강한 방해 전파를 쏘고 있지만 잦은 고장과 전력난 때문에 방해 전파를 쏠 수 없을 때가 많다. 반면 평양엔 거의 모든 집엔 축전기가 있다. 국가엔 막을 전기가 없지만, 개인에겐 몰래 볼 전기가 있는 것이다.

평양도 막기 어려운 판이니 남포를 비롯한 서해안 지역에선 한국 TV를 얼마든지 볼 수 있는 판이다. 북한 당국은 2016년에 이걸 막기 위한 ‘대책’도 고안해냈다. 그 대책은 이어지는 109상무 이야기에서 이어할 예정이다.

갖은 통제에도 불구하고 인기리에 밀매되는 휴대용 LCD TV를 갖고 산에 오르면 맘 편히 한국 TV를 볼 수 있다. 북한에서 볼 수 있는 한국 채널은 KBS를 위주로 SBS, MBC 프로그램이 두루 섞인 것이라 한다.

만약 북한에 채널A의 ‘이제 만나러 갑니다’와 같은 프로그램을 송출한다면 아마 그걸 접하는 일반 주민들은 물론 당국의 반응도 대단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