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필수 인사차림-“제 성의로 알고 써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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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하 2019.11.08 18:08


담배가 가장 일상생활에서 스스럼없이 사용되는 뇌물이긴 하지만, 다른 유형의 뇌물도 다양하게 오간다.

술이나 시계 안경 같은 기호품, 컴퓨터나 TV, 냉장고 같은 가전제품, 심지어 소파나 침대와 같은 가구에 이르기까지 뇌물 형태는 정말 다양하다.

그럼에도 담배 대신 많이 오가는 뇌물이라고 하면 현금을 꼽을 수 있다.

현금은 주로 주는 사람이 선호한다. 일반적으로 뇌물을 요구하는 사람은 물품으로 요구한다. 뇌물을 요구하면서 직접 돈을 요구하기보다는 이러저런 사정을 넌지시 내비치며 물품으로 요구하는 것이 체면상 거슬리지도 않고 안전상 담보도 되기 때문이다.

이러면 뇌물을 주는 사람은 그가 요구한대로 물품을 주든지, 아니면 요구한 물품을 사라고 돈을 주든지 선택해야 한다. 그러나 목적이 있어서 뇌물을 주어야 할 사람의 입장에서 가장 좋은 것은 돈이다. 액수가 확실하기 때문에 나중에 일이 처리되지 않아도 돌려받기 쉽기 때문이다.

또 돈은 부피가 작아서 건네기도 쉽다. 담배를 건네는 척 하면서도 그 안에 돈을 채워 건네는 방식도 북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방식 중 하나다.

보통 간부들은 뇌물을 받을 때는 일반적으로 모르쇠를 한다. 북한에서 뇌물을 건넬 때 쓰는 표준적인 기준이 있다.

“부장 동지, 요즘 부인이 앓는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미처 찾아뵙지 못해 미안합니다. 이걸로 약이라도 좀 사드시라요.”

“비서 동지, 따님 결혼식 때 가보지 못해 미안합니다. 늦은 감은 있지만 제 성의입니다.”

이런 식으로 말을 하며 건네면 무난한 방식이다.

혹은 쭉 용무를 설명하고 단도직입적으로 “제 성의로 알고 써주십시오”라는 말과 함께 봉투를 올려놓고 재빨리 자리를 피하는 방식도 북한 사람들이 자주 쓴다. 대개 그러면 받은 사람이 잠잠하다. 그럼 일은 잘 처리된다.

그런데 뇌물 받은 사람이 다시 찾는 경우도 있다. 돌려줄 때엔 보통 “사람을 뭘로 보고 이런 걸”하며 혀를 차며 돌려준다.

이런 말과 함께 돌려주는 이유는 딱 두 가지 뿐이다. 하나는 자기 능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뇌물이 적다는 것이다. 대체로 후자가 많은데, 사람들 대부분이 청탁을 거절당할 경우 ‘깨끗한 사람이군’ 하고 생각하기보다 ‘내가 너무 적게 주었군’ 하고 여긴다.

뇌물은 이렇게 평범한 사람들의 인식에 뿌리박혀 부패를 지속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다. 그런데 역시 이런 뇌물에도 하나의 룰이 있다. 자기가 책임질 수 없거나 쉽게 적발될 뇌물은 절대로 먹지 않는 것이다.

뇌물을 준다는 표현을 북에선 거의 쓰지 않는다. 보통 ‘인사차림’이라고 하는데, 그 외에도 ‘약을 쓴다, 고이다, 검은돈, 뒷돈’ 등의 표현이 있다. 여기서 검은돈이나 뒷돈이라는 말은 뇌물 행위를 비하할 때 쓰는 말이다. 뇌물 행위 자체가 아름답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여기에도 이렇게 가려 쓰는 말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노골적인 뇌물 행위를 강요할 때에도 “여, 인사차림 좀 해야지?” “약 좀 쓰라” “뭘 좀 고이라”라는 식으로 말하지, ‘검은돈’이나 ‘뒷돈’을 내라고 하지는 않는다.  욕하고 싶은 대상에게 “그 자식 검은돈 많이도 처먹더니 끝내는 쯧쯧…”한다든가 “너처럼 뒷돈을 많이 먹으면 그렇게 돼” 하는 식으로 쓰인다.

북한은 이처럼 중앙에서 지방까지, 위에서 아래까지 뇌물이라는 거대한 사슬로 연결돼 있다. 그런데 북한에서 뇌물 없이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고 순간도 살 수 없을 것 같지만 정작 그렇지는 않다.

여기에도 뇌물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바로 최고위 권력층과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사는 사람들이다.

고위 권력층에 사는 사람들은 거의 뇌물을 쓰지 않는다. 사실 쓸 데가 없는 것이다. 어떤 미련한 이가 권력자에게서 뇌물을 받고 애써 이루어놓은 자기의 지위와 부를 잃겠다고 하겠는가.

권력자들의 말 한마디가, 행동 하나가 그대로 실현될 수밖에 없으니 뇌물을 쓸 필요가 없다. 병원에 치료받으러 가도, 자식들을 대학에 보내도, 군 복무를 시켜도 그냥 말 한마디면 된다. 아니, 말도 필요 없을 때가 더 많다. 저 사람 아버지가 무슨 직위에 있다 이것만 알려져도 웬만한 뇌물이 오간 것보다 훨씬 더 일이 잘 처리된다.

사회의 밑바닥 층에 사는 사람들은 그 모든 것을 무시하고 그저 살아간다. 북한 농촌에서 뼈를 깎아 밭을 일구어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진짜 ‘인민’들은 이런 뇌물과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다.

그들은 인사차림을 할 곳도 없으며 해야 할 이유도 없다. 그저 먹고 살며 생을 이어나가면 그만인 것이다. 물론 자식 문제가 걸리면 이들도 어렵게 돈을 모아 뇌물 쓰려 나설 수밖에는 없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