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강지처 버리고 양다리 걸치던 제대군인의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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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하 2019.11.18 17:50


조강지처를 버렸다 혼나는 분위기를 최근 평양의 모 명문대학에서 실제로 있었던 사례를 들어 구체적으로 설명해보자. 사실 이런 사례는 많은데 하나만 실례를 드는 것이고, 이 이야기를 통해 현재 북한의 풍속을 짐작케 하는 많은 정보들을 알 수 있으리라 보기 때문이다.

집이 지방 대도시에 있는 간부집 자식 최모 씨는 군에 입대해서도 ‘꽃보직’에 있으며 편하게 생활을 했다. 그런데 제대 무렵 덜컥 아버지가 사망했다. 그래도 아버지의 후광으로 중앙대학 추천을 받았지만, 앞으로 대학 다닐 일이 막막했다.

겨우 버텨 대학 2학년까지 올라왔지만, 문제는 돈을 많이 써야 하는 시기는 그 이후부터란 점이다. 6개월 동안 군에 갔다 오는 ‘교도대 생활’이 있고, 혁명 사적지 답사도 있고, 졸업할 때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 써야 할 뇌물도 엄청나다. 돈을 물 쓰듯 해야 하는 데, 원래부터 풍요한 집안에서 자란 최 씨는 더 돈에 쪼들릴 수밖에 없다.

그는 결국 대학 2학년 겨울 방학 때 집에 내려갔다가 그 도시에서 잘나가는 갑부집 딸이라고 하는 여성과 혼인하고 말았다. 인물도 평양 미인들보다는 못해도 그만하면 괜찮고 특히 돈 있는 집이라 이후 대학생활 걱정을 덜게 된 것이다.

결혼 조건으로는 앞으로 남은 대학 기간 소비할 돈을 전부 대주고 졸업 배치에 필요한 자금도 마련해주며 졸업 후 집까지 사준다는 약속을 받았다.

그래서 일단 약혼식을 올렸다. 약혼만 해도 북한에선 이미 결혼한 여자로 보지만, 원래 함경도를 포함한 북쪽 지방 풍속은 비교적 완고해 결혼식 전에는 남녀를 한 방에 들이지 않는다.

고난의 행군 이후로 북한도 성 분야가 상당히 개방되어 결혼만 약속되고 약혼식 정도까지만 해도 한 방에서 사는 경우가 많지만, 아직도 보수적 풍속과 전통을 유지하러 애쓰는 가정들도 많다.

어쨌든 최 씨가 첫날밤을 보냈든 안 보냈든 알 수는 없지만, 부잣집 처를 얻은 그는 평양에 올라와서 기숙사에서 나와 밖에 집을 얻고 살 수 있었다.

대학 기간 이런 제대군인들이 소비하는 돈은 형편에 따라 각이한데 대체로 한 달에 100달러부터 300달러 정도이다. 100달러만 돼도 쌀 150㎏ 이상 살 수 있는 엄청난 돈이다.

원래 평양에서 대학에 다니면 엄청난 돈이 드는 것은 내가 1990년대 대학에 다닐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때도 아무리 아껴 써도 내가 한 달 쓰는 돈이면 집 식구들이 두 달을 먹고 살 수 있었다.

지금은 먹고 살면서 필요한 뇌물도 쓰고 친구들과 때때로 식당도 다니면서 여유롭게 살려면 평양에서도 300달러 정도는 있어야 한다. 부자 딸을 얻은 최 씨는 한 달에 500달러 이상을 소비하면서 여유롭게 살았다.

그러나 해도 지는 때가 있는 법. 잘 나가던 처가집 장사가 잘 안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보급’이라고 흔히 부르는 경제적 지원이 줄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거기에 최 씨의 심경 변화도 있었다.

군 복무 때까지는 잘 몰랐는데 평양의 수준 있는 대학에 와서 돈 좀 쓰면서 친구들이랑 사귀고 멋진 아가씨들이 서빙하는 식당에도 찾아다니다 보니 자기 처는 역시 촌 여자였다. 아무리 북한의 몇 번째 안에 드는 도시에서 돈 좀 있다고 해도 역시 평양의 간부댁 아가씨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찰나에 대학 졸업에 임박해 한 친구가 간부 집 딸 하나를 소개해주었다. 물론 최 씨는 대학 전 기간 자기가 이미 약혼식까지 한 여자가 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지내왔다. 대학 기간 장가를 들어 결혼 등록까지 하면 졸업 배치에서 여러 가지 불이익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평양에 거주하기 위해 졸업 후 평양에 소재한 군부나 보위부, 보안성 같은 권력 기관에 들어가고 싶어도 지방에 처가 있으면 거의 불가능하다. 총각인 경우가 가장 이상적이고 적어도 평양 처녀를 색시로 맞아야 한다.

최 씨를 소개받은 간부 집에서는 그의 가정 토대도 괜찮고 대학생활 과정에도 다른 편향이 없었다는 중매자의 ‘제보’에 따라 그를 사위로 택하기로 했다. 졸업 배치를 잘 해주고 뒤만 좀 봐주면 발전은 시간문제라고 본 것이다.

내가 평양에 있을 때에도 이렇게 중앙당 간부들이 지방의 영세한 집안의 청년을 사위로 맞는 경우가 많았다.

이상하게도 중앙당 간부들은 아들보단 딸이 많았는데, 이렇게 미천한 집안이지만 ‘간부징표’를 다 갖춘 총각을 데릴사위로 들이면 그다음엔 처갓집에서 밀어주는 대로 잘 나갈 수 있다.

그럼 사실상 데릴사위가 아들 노릇 하는 셈이다. 아들집이 힘이 있으면 데릴사위 맘대로 부리기 어려우니 오히려 지방 간부집 자식보다는 영세한 집안 자식이 낫다.

최 씨의 경우도 부친이 간부였지만, 이미 사망했기 때문에 어느 간부가 욕심을 낸 것이다. 이렇게 되어 최 씨는 처갓집을 두 개 가지게 되었다. 물론 도저히 허용될 수 없는 일이어서 그는 온갖 구실을 만들어내 지방 여자와 파혼을 선포하고 말았다.

그러나 근 3년 세월을 뒷바라지 하며 딸의 행복만을 바라본 그 집 사람들이 가만있을 리 만무하다. 파혼 당한 지방 여자 본인이 더욱 참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녀는 평양에 올라와 대학에 최 씨의 ‘죄’를 신소했지만 도무지 반응이 없었다. 알고 보니 최 씨가 새 장인에게 자기 죄를 이실직고하고 용서를 빈 것이다.

장인도 화가 머리꼭대기까지 낫지만, 그렇다고 그를 내치자니 자기 딸이 또 졸지에 이혼녀가 될 판이었다. 할 수 없이 장인은 최 씨를 감싸주기로 결심하고 대학에 힘을 행사한 것이다.

결국 이 싸움은 지방의 부잣집 여성과 중앙당 간부의 힘의 대결이 됐다. 힘에서 밀리자 지방의 옛 처갓집이 모두 나섰다. 격분한 이들은 장사 밑천까지 모두 털어 중앙당에 줄을 놓았고 결국 검열을 받은 대학에서는 최 씨를 더는 봐줄 수 없었다.

최 씨는 대학에서 퇴학을 당했다. 그런 그를 새 장인이 더 이상 뒤를 봐줄 이유가 없었다. 최 씨는 두 번째 여성에게도 파혼당하고 자기 고향으로 내려갔다. 대학 졸업증도 없는 그가 앞으로 잘 나갈 일은 거의 없다.

이처럼 북한에서도 혼인으로 자기 운명을 바꾸려는 일들이 비일비재로 일어나고 있다. 요즘은 성이 많이 개방되면서 북한에선 연애할 상대 따로 있고 결혼할 상대 따로 있다는 말도 퍼지고 있다.


   
박혜연 01/16 19:28 수정 삭제
9년넘게 북송을 요구하며 현재도 북송요구 시위를 벌이고 계시는 대구거주 탈북민 김련희씨도 5년전 박근혜정부때 영남일보 인터뷰에서 이렇게 지적을 해줬죠~!!!! 평양에서는 이혼하면 당장 추방이고 범죄를 저지르면 평양시민 박탈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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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연 01/17 12:17 수정 삭제
북한의 영화들이나 드라마들을 보면 이혼에 관한 이야기를 찾아보기가 힘들죠~!!!!! 이혼위기가 있는 이야기가 있을지는 몰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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