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 집에서 만난 탈북 1세대 전철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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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하 2020.09.23 11:27

24일 성동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탈북 1세대 사업가인 전철우 (주)에쎈 대표. 사진=주성하 기자.

“남쪽에서 30년을 살아보니 말이지. 탈북해 여기에 정착을 잘 하려면 머리 좋은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성격이 제일 중요한 것 같아. 괴로운 일이 있어도 웃고 잊고 그렇게 넘어가야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거야. 내성적이거나 성격이 섬세한 사람은 견디기 어려워하더라고. 그런 사람은 한국에 와서 처음엔 막 신나서 좋아하다가 또 엄청 환멸을 느끼고 그러는데 감정 기복이 산과 계곡처럼 오르락내리락 하면 살기 힘들지.”

1989년 북한 국비 유학생으로 동독에 유학 갔다가 한국으로 탈북한 사업가 전철우 대표(53)를 24일 서울 성동구의 한 식당에서 만났다. 전철우는 그 이름 자체가 하나의 브랜드로 한국에 많이 알려졌다. 그를 다룬 기사는 대개 ‘돈을 많이 벌었다더라’ ‘사업을 새로 시작했다더라’는 것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그는 탈북 1세대의 원조 격이라 할 수 있다. 한국에 오랫동안 살면서 그가 겪은 삶을 어찌 돈이나 사업 성패로만 판단할 수 있을까. 그가 이방인으로 이 땅에 정착하기까지의 과정, 그의 눈으로 지켜보는 탈북민들의 정착 등을 들어봤다.

# “지금도 사기는 당하고 살지.”

“인생이 뭔지 아직도 잘 모르겠어. 그냥 살아가는 것 같아. 어디 마음대로 흘러가는 것이 없잖아. 순간순간 후회 없이 살자고 열심히 노력하지만 아직 잘 모르겠어. 남에게 피해주지 않고 편안하게 살도록 노력하는 게 내 인생인 것 같아. 편안하게 산다는 게 말은 쉬워도 막상 그렇지 않더라고. 재벌도 편안하지 못하지. 그렇게 돈 많은 사람도 감옥가고 하는 걸 보면서 나는 잘 사는구나 하고 위안을 얻지.”

전 대표는 식탁이 4개 밖에 없는 작은 시장 골목 식당으로 필자를 잡아끌었다. 오랜 단골이라고 했다. 모듬전에 막걸리를 시켜놓고 동네 형이 옆집 동생에게 이야기하듯 편안하게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사실 그의 드라마틱한 인생사는 이미 한국에 다 알려졌다.

귀순, 연예인, 사업, 실패, 이혼, 사기, 성공…. 그의 이름과 함께 항상 따라 다니는 단어들이다.

사기도 수없이 당했고, 당할 때마다 언론을 통해 간간히 전해졌다. 그래서 물었다.

“이제 한 30년 사기 당했으면 이젠 사기꾼을 가려보는 데는 완전 도사가 됐을 거 같은데요.”

전 대표가 손사래를 친다.

“아니야. 지금도 당해. 베트남에서 사업을 한다고 나갔는데 또 사기 당했어. 한국에선 이젠 나름 사람 보는 눈도 있고, 모르는 것은 잘 하지 않으니 이제는 사기 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외국에 나가선 또 누군가와 손을 잡고 사업을 해야 하니 또 당하지. 하도 당하니까 이젠 ‘이번은 조금만 당해서 다행이다. 손해를 최소화하고, 빨리 피하고, 빨리 잊자’가 좌우명처럼 됐어.”

그는 2017년 ‘전철우의 맛있는 주방’이라는 브랜드를 내걸고 베트남에 진출했다. 하노이에 즉석식품 가공공장을 세웠고 지난해 11월에는 200평이 넘는 큰 식당도 열었다. 그런데 사업을 확대하려는 순간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퍼졌다. 요식업계 전반이 피해를 봤고 그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베트남 정부가 한국인 입국을 금지하면서 올 3월 한국에 들어왔다가 하노이에 다시 나가지 못하고 있다.

“지금은 한국 사업에 다시 집중하는 중이야. 신속하게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사장이 베트남에 나가 있으면 또 국내 사업이 생각처럼 잘 돌아가지 않더라고. 둘 다 같이 하긴 어려워. 베트남은 지금 딴 사람에게 맡겨 놨지.”

“자꾸 사기 당하면 사람 쓰기 무섭지 않나요?”

“사람을 쓰지 않고선 사업을 못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어. 그러니까 사람에게 간혹 배신당해도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가지. 사람을 멀리 하고 어떻게 사업할 수 있나. 독만 되는 게 아니라 약이 될 때가 더 많아. 정작 내가 제일 어려운 건 시장을 개척하는 거야. 될 것 같았는데, 안되고, 안될 것 같았는데도 되고. 아직도 쉽지 않아. 한국은 과거엔 6개월마다, 지금은 3개월마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해. 뭘 하나 시장에 내놓으면 경쟁자들이 가격을 낮추고 따라와. 멈추는 순간 죽는 거지.”

탈북민 중에서 가장 성공한 사업가라는 말을 듣는 그 역시도 지금까지 멈추면 죽는다는 마음가짐으로 열심히 쉬지 않고 달리고 있는 중이다.

“아직도 계속 새로운 걸 만들고 확장하고 하다보면 지치지 않나요?”

“나이가 들면 보수적이 돼가는 것은 어쩔 수 없어. 과거엔 사이즈(규모)에 집착했는데 이젠 버는 것보다 지키는 것에 더 신경을 쓰게 돼. 예전처럼 투자금액, 직원 숫자 이런 것에 집착하기보다는 적어도 확실한 내 것이 더 소중해지는 것 같아. 그래서 지금은 완벽하다 판단되지 않으면 일을 벌이지 않아.”

베트남에 진출한 전철우 대표가 하노이에서 박준뷰티랩 대표(가운데)와 박항서 감독과 만나 찍은 사진. 전철우 대표 제공

# 전라도 담당 안보강사

막걸리 두 병과 고기전과 홍어전을 함께 담은 접시가 금새 바닥이 났다. 그가 주방을 향해 소리쳤다.

“사장님, 이거 똑같은 걸로 한 접시 더 줘요.”

그리곤 일어나 냉장고를 열고 막걸리를 직접 꺼내왔다.

“요식업체 대표를 수십 년 하다보면 맛에 민감할 텐데, 이렇게 골목에 숨은 작은 식당을 단골로 삼은 이유가 있나요?”

“맛있잖아. 내 입에는 이 전들이 참 맛있어.”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입은 과거를 잊지 못하는 듯 했다.

“그런데 김책공대 다니다가 독일 드레즈덴 공대에 유학을 갔고, 한국에서도 한양대 전자공학과를 다닌 것으로 아는데, 한국에 와서 왜 개그맨하고, 음식 장사 시작한 건가요. 그거 하고 싶어서 부모형제 두고 탈북한 건 아닐 거 아니에요?”

“그땐 어렸지. 동독이 무너지니 북한도 5년 내로 무너질 것 같았어. 빨리 한국에 가서 자본주의를 배워 돈을 벌면 5년 뒤 고향에 갈 수 있다고 생각했지.”

그는 과거 얘기가 시작되자 쉼없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는 한국에 처음 와 정보 요원들에게 “광주에선 왜 그렇게 사람 많이 죽였어요”와 같은 엉뚱한 질문을 자주 던졌다고 했다. 당시 화제가 됐던 임수경 방북 사건과 관련해서도 “임수경 때문에 북한 사람들이 한국을 다시 보게 됐다”고도 했다.

결국 정보당국은 ‘전철우의 입은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귀순 기자회견 때 독일에서 그와 함께 탈북한 친구였던 장영철에게만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하도록 했다. 전철우는 옆에서 입을 닫고 있었다. 이후에도 기자들이 찾을 때마다 장 씨만 나갔다. 그랬더니 기자들이 왜 둘이 왔는데 하나만 말하느냐고 난리를 쳤다.

1989년 12월 9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탈북 후 첫 기자회견을 하는 전철우 씨(오른쪽), 그 옆이 함께 동독에서 탈북한 장영철 씨이다. 동아일보 DB

“어느 날 정보기관 담당자가 부르더니 KBS ‘남북의 창’이란 방송에 나가야 하는데 입을 조심하라고 몇 번이고 강조했어. 방송 같은 건 그때 관심도 없었는데, 막상 나가니 예쁜 여기자들이 옆에 앉아 질문을 던지니 들뜨는 거야. 그래서 신이 나서 말했지. 그때는 북한 사람의 이미지가 경직되고 증오만 가득 찬, 나라에 충성을 바치는 사람들처럼 여겨졌어. 그런데 내가 겨울에 평양 거리에 나가 눈을 치기 싫어 숨었던 이야기 같은 것을 웃으며 얘기하니 저기(북한)도 저렇게 날라리들이 있구나 싶어 이미지가 확 바뀐 거지. 방송 끝나고 정보기관 담당자가 막 뛰어오더니 ‘대박이다. 대박’ 이러는데 대박이 뭔지도 몰랐어. 그다음부터 방송에서 계속 단골로 출연하다보니 방송인, 개그맨도 됐지. 허허.”

당시는 탈북자가 귀순자로 불리던 시절이었다. 한국에 오는 숫자도 적었다. 한국에 온 귀순자는 전국을 돌며 몇 년씩 귀순강의를 하던 시절이었다.

“난 전라도 고정 담당이었어.”

“아니, 왜요. 탈북자들이 강연 가기 꺼리는 곳 아닌가요.”

“처음엔 멋모르고 갔지. 광주 조선대, 전남대 이런 데를 보내는 거야. 갔더니 청중으로 온 내 나이 또래의 대학생들이 팔장을 끼고 삐딱하게 앉아 쏘아보는 거야. ‘왜 조국을 배반하고 왔느냐’고 욕을 하더군. 거기에 기가 죽진 않았어. ‘여긴 여기 앉은 사람이 대통령도 되고 그러는 사회 아니냐. 나도 대통령 하고 싶은데, 거긴 아버지, 아들이 다 해먹고, 그 연줄로 다 하니 올라갈 틈도 없다. 나도 정말 돌아가서 올라가고 싶다’ 이렇게 막 떠들어댔지. 그게 먹혔나봐. 강의가 끝나니 그 학생이 날 부르더니 옥상에 데려 가더군. 같이 간 요원도 못 오게 하고 말이지. 얻어맞는 건가 싶었는데 막걸리 한잔 부어주더니 하루 더 있다 가라더군.”

“저도요, 2002년에 한국 와서 몇 달 뒤 조선대에 갔는데 그때도 저를 보고 배신자라고 했어요. 형님 때는 더 했겠죠. 그런데 나보고는 막걸리 주면서 자고 가란 말 안하던데. 난 진짜 배신자처럼 보였나봐. 하하.”

“그렇게 강의를 마치고 나니 그 다음부턴 계속 안보강의 할 때마다 나를 전라도에만 보내는 거야. 지내고 보니 전라도 사람들이 의리는 있더라고. 아무튼 그렇게 인연을 맺었고, 광주에 전철우사거리도 있는 거 알지?”

“몰라요.”

“그런 게 있었어. 인터넷에 찾아봐.”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기 위해 커피 만드는 법을 배우는 전철우 대표. 전철우 대표 제공.

# 우주가 내 마음을 끌어

과거 이야기하며 막걸리 잔이 몇 번을 더 오갔을까. 취기가 느껴질 무렵 몇 마디 더 질문을 던졌다.

“여기 와서 계속 오뚜기처럼 일어선 비결 같은 뭘까요.”

“내 장점은, 우선 부모님이 참 낙관적인 성격을 물러주신 것 같아. 낙천성을 타고 났으니 아픈 일이 있어도 빨리 털고 일어나. 배신당했다 생각하면 일이 잡히지 않는데, 나는 그건 참 빨리 극복해. 둘째는 아무리 최악의 순간이라도 어떤 상황인가를 객관화하는 능력이 타고 난 것 같아. 아무리 나락에 빠져도 ‘여기서 더 무너지지 말자’ ‘절대 지저분해지지 말자’고 자기 최면을 걸어. 거기서 지저분해지면 다시 일어나지 못하거든.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내가 지금 갖고 있는 것이 뭔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일이 뭔가를 냉정하게 가려봐야 하거든. 요즘은 한 가지만 잘 해도 돼. 옛날에는 돼지 잡으면 백정이라고 놀렸는데, 이젠 돼지고기만 잘 손질해도 셰프라고 대접 받거든.”

“그건 원론적인 말이고, 한 가지 잘해서 일어선 건 아니잖아요.”

“나는 사람을 제일 중요하게 여겨. 사업은 망해도 사람을 잃으면 안돼. 신뢰, 평판, 존중 이런 게 있어야 재기가 가능하거든.”

“그건 전철우란 브랜드를 가졌으니 하는 말이고, 일반적인 탈북자들은 중요하게 여길 사람도 없이 시작해야 해요. 그런 말 탈북자들에게 하면 욕먹어요.”

“그래, 그건 그렇겠네.”

그는 순순히 수긍했다.

“요새 취미가 뭐예요?”

“넷플렉스에서 드라마 보는 걸 좋아하는데, 우주 이런 것에 끌려. 우주와 인생을 비교하면 ‘뭘 하려고 찰나의 인생을 이렇게 고생하며 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그러다보니 결국 오늘 행복한 것이 제일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지. 매일 행복하자, 행복하자 이러며 살지.”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막걸리에 취해 헤어질 때까지 그의 눈은 내내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