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장관 아들’ 평양음악대학 교수의 한국 정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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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하 2020.11.08 10:26

황상혁 전 김원균명칭음악종합대학 교수가 지난 주 기자와 만나 북한 음악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서울에서 북한 음악에 대해 궁금하다면 그를 찾아가면 된다. 한국에 온 탈북자 중 그만큼 북한의 음악 교육의 최정점에 있었던 사람은 없었다.

황상혁 교수(46)는 북한 최고의 음악대학인 ‘김원균명칭음악종합대학’에서 20년 동안 피아노 교수로 재직하다 6년 전 탈북해 한국에 왔다. 북에 남겨둔 가족들 때문에 조용한 은둔을 해왔지만 지난해부터 언론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의 ‘커밍아웃’ 덕분에 아직도 잘 알려지지 않은 북한 음악은 가려졌던 베일을 한 꺼풀 또 벗게 됐다.

황 교수는 북한에서 ‘금수저’의 자식으로 태어나 최고의 엘리트 영재 교육을 받으며 고생을 모르고 살아왔지만 서울에서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자신과의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

# 서울에 온 北 장관의 아들

북한 외교관들의 망명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한국 언론은 그의 부친은 누구고, 장인은 누구인지를 캐내 보도한다. 하지만 장관의 아들인 황 교수는 2014년 언론의 주목을 받지 않고 조용히 서울에 들어왔다.

북한에서 그의 삶은 탄탄대로였다. 1974년 평양의 김일성 저택에서 태어났다. 중구역 성문동 만수대의사당 뒤편에 있는 북에서 5호 초대소라고 불리는 관저다. 그가 그곳에서 태어난 이유는 그의 할아버지가 호위사령부 부부장으로 관저에 입주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 교수의 부친은 1993년 만들어진 국토환경보호위원회 초대 위원장(장관급)을 지냈다. 국토환경보호위원회는 현재 국토환경보호성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모친도 평양 외국인병원에서 오랫동안 의사로 일했다. 외국인 병원은 각종 약이 풍부하게 제공되기 때문에 북한 의사들이 가장 일하기 원하는 병원이기도 하다.

황 교수의 형제들도 형이 조평통 간부를 지내는 등 북한의 요직에서 근무했다. 황 교수의 장인은 외무성에서 태영호 전 주영 북한대사관 공사와 같은 부서에서 근무했고 주 스웨덴 북한 대사관 참사를 지냈다.

이런 끗발 있고,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황 교수가 음악을 시작한 건 인민학교 3학년 때인 9살부터였다. 어머니가 내성적이었던 그를 음악인으로 키우겠다며 평양학생소년궁전으로 데려간 게 시작이었다. 황 교수는 그곳에서 피아노를 배웠다. 이후 평양예술전문학교에 진학했고, 14세 때인 1988년엔 당시 평양음악무용대학 전문부에 편입했다. 전국에서 10명만 선발된 학생들과 함께 피아노를 쳤다.

대학 졸업 후 만 20세 때 그는 평양음악무용대학 기악학부 피아노 강좌 교원으로 임명됐다. 이곳에서 2년 정도 학생을 가르치던 그는 지휘자가 되고 싶어 다시 전국에서 극소수만 선발돼 다니는 지휘 박사원을 3년 동안 다니며 지휘자 자격증을 받았다. 박사원은 한국의 대학원을 의미한다. 2018년 한국에 파견된 북한 예술단 공연을 지휘했던 윤범주가 대학 1년 후배다.

한국에선 예술 인재들을 양성하는 북한 최고의 학교가 금성학원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김정은의 아내 이설주가 이 학교 출신으로 알려지면서 금성학원에 대한 신비감이 더욱 커졌다.

그러나 북한에서 정통 예술인들을 양성하는 곳은 김원균명칭음악종합대학이다. 그 차이에 대해 황 교수는 이렇게 설명했다.

“금성학원은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청년동맹) 소속이고, 음악대학은 문화성 소속입니다. 금성은 원래 김일성을 위해 설맞이 공연할 학생들을 키우기 위해 만들어진 곳인데, 보천보전자악단이 뜨면서 ‘마이크 가수’와 전자악기 연주가를 키우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죠. 북한 예술계의 정통 성악 가수와 ‘기악쟁이’들은 다 음악대학에서 키운다고 보면 됩니다.” 그의 설명을 듣고 나니 금성학원은 북한판 아이돌 양성소라고 보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에서 촉망받는 음악인 코스를 걷던 그는 2003년 중국에 파견된다. 북한의 답답한 울타리에 갇혀 있던 황 교수는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었다.

당시 북한은 동북 3성에 대한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 20명의 예술교육전문가 대표단을 파견했다. 음악대학과 만수대, 피바다, 국립민속예술단 등에서 뽑힌 사람들이 중국 현지에 체류하며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들은 선양, 장춘, 옌지 등에 음악학원을 차려놓고 음악에 자질 있는 중국 학생들을 교육했다. 이렇게 배운 중국인들이 북한에 들어가 ‘4월의 봄 예술축전’ 등에 참가해 공연하면, 김 씨 일가를 흠모하는 외국인들로 둔갑하게 된다. 이런 정치적 의도와 더불어 학생들을 가르치며 외화벌이도 같이 하게 됐다.

# 의도치 않았던 탈북

3년 파견기간이 끝나 2006년 북에 돌아간 황 교수는 김원균명칭음악대학에서 피아노를 가르치다 2011년 중국에 다시 파견돼 나왔다. 그리고 파견 기간이 끝나기 직전인 2014년 탈북하게 됐다.

그가 탈북한 계기는 더 넓은 세상에서 음악을 배우자는 식의 거창한 이유가 아니었다. 중국에 체류할 동안 한국인을 몰래 만났는데, 귀국 무렵이 되자 보위원이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행적을 캐고 다닌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해외에 파견됐다가 한국인들과 만났다는 이유로 쟁쟁한 음악인생이 끝나 감옥에 끌려가고 가정이 파탄 난 선배들의 사연이 떠올랐다.

보위원이 지금은 모르는 척 하지만 어디까지 캐냈는지 알 수 없었다. 북에 갔다 한국인을 만난 증거를 제시하면 꼼짝없이 감옥에 끌려갈 것이란 공포심이 그를 괴롭혔다. 그가 만났던 한국인은 미국에 데려다 주겠다고 했지만 정작 길을 떠난 뒤 말이 바뀌었다. 동남아의 한 나라 미국 대사관까지 찾아갔지만, 미국 정부가 받아주기로 했다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그가 떠난 뒤 한국 언론에는 ‘평양음악대학 교수가 탈북했다’는 뉴스가 떴다. 돌아갈 수도 없는 몸이 됐다. 그는 미국을 포기하고 한국을 최종 목적지로 정했다.





# 기초생활수급자가 된 대학교수

서울로 온 뒤 그는 새롭게 인생을 개척해야 했다. 피아노에만 파묻혀 있어도 살아가는데 걱정이 없던 북한에서의 삶과는 전혀 달랐다. 한국에 온 뒤 임대아파트에 사는 기초생활수급자가 됐다. 31년 동안 피아노만 연주해 왔던 북한 피아노 영재는 서울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정글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한국 피아노계는 클래식과 실용음악으로 양분돼 있다. 그가 북에서 배웠던 음악과는 결이 확연하게 달랐다.

“북에서 음악대학 작곡학부 지휘자 양성반 피아노 연주자를 몇 년 했던 적이 있어요. 지휘자 훈련을 위해 관현악단을 대신해 피아노를 연주하는 사람인 거죠. 여기서 연주하면 세계 관현악곡은 거의 연주하게 됩니다. 그걸 하고 싶어 제가 자원했었습니다. 북한도 베토벤, 체르니 등의 고전 클래식을 연주하긴 하지만, 미국 음악 같은 것은 전혀 배울 수 없습니다. 한국에 오니 이곳 클래식 피아니스트들은 한 거장의 음악을 끝까지 파고들더군요. 그게 북한과 다른 점이었죠.”

그렇다고 북한 피아노계가 완전히 폐쇄적인 것은 아니라고 황 교수는 설명했다.

“북한도 피아노곡은 정말 많습니다. 대중가요, 동요 등을 재해석한 곡들은 양적으로도 어마어마하죠. 북한 피아노의 장점은 클래식에 민족적 색깔을 가미해 변형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클래식과 실용음악의 중간쯤에 머물렀던 황 교수는 남쪽에서 음악을 새롭게 배워야겠다고 결심하고 서울대 음악대학원 석사 과정에 들어갔다. 하지만 여기서도 난관이 생겼다. 연주는 자신이 있었지만, 석사 학위를 따려니 영어 점수가 있어야 했다. 북에선 음악인들이 외국어를 잘할 필요가 없었다. 기자와 만났을 때 그는 두터운 영어책을 펴놓고 문장을 중얼중얼 외우고 있었다. 1년째 그렇게 공부하고 있다고 했다. 서울에 와서 만난 가장 힘든 난관이고, 넘어가야 할 벽이었다.

2018년 12월 서울대 음악대학 대학원 석사과정 졸업 연주회에 나선 황상혁 교수. 황상혁 교수 제공

# 북한 전문직들의 미래는?

황 교수는 통일이 된다면 북한 예술계, 의학계 등에 종사했던 전문직들이 어떻게 한국 사회와 성공적으로 융합될 수 있는 지를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분단 75년 동안 북한은 자기 나름의 예술 세계를 파고 들어왔다. 세계 예술계의 관점에서 보면 ‘예술의 갈라파고스’ 같은 곳이 북한이다.

황 교수는 그곳에서 피아노만 치다가 새로운 세상에 왔다. 지금까지 37년 동안 갈고 닦은 그의 연주 실력은 북한 최상위급이고, 여기에 북한에서 작곡과 편곡, 지휘 능력까지 갖춘 인재로 양성됐다.

하지만 불시착한 한국에서 그는 ‘외래종’같은 존재가 됐다. 황 교수는 한국 음악과 북한 음악의 ‘이종교배’가 가능할지를 판단하는 시금석이 될 것으로 보인다.

황 교수 같은 음악인들이 한국 사회에 정착하지 못하면 통일된 뒤 북한에 존재하는 수많은 ‘인민예술가’ ‘공훈예술가’들은 실업자가 될 수밖에 없다. 김정은의 총애를 받는 북한의 최고의 실력자라 할 수 있는 윤범주 은하수관현악단 지휘자도 한국에 오게 되면 예능프로그램에 나가 입담을 자랑하는 것 외엔 할 일이 없어질지도 모른다.

먼저 온 황 교수는 그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있다. 그는 우리 민족의 전통 민요나 한국의 동요 등을 새롭게 편곡하고 싶은 욕심을 갖고 있다.

“남쪽에 오니 클래식 우물을 깊게 파던가, 아니면 유행곡을 만들든가 두 가지 선택의 기로에 섰어요. 그러나 제가 잘 할 수 있는 일은 기존 음악의 재해석입니다. 이건 한국이 아직 많이 발전됐다고 볼 수 없는 분야인 것 같아요.”

그런 문제의식 속에 그는 ‘아리랑’ ‘어메이징 그레이스’ 등 여러 곡을 새롭게 편곡해 발표했다. 황 교수를 인정하고 격려해주는 사람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아쉽게도 올해는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이 확산되면서 그 역시 공연할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다. 북한 최고의 음악대학 피아노 교수에서 한국 음악대학 대학원생이 된 그는 언젠가 낡은 허물을 벗고 새롭게 태어나 날개 짓 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