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서 밀차 끌던 혜산 남자, 매출 25억 사장님 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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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하 2020.11.16 09:55

김인철 지원인쇄출판사 사장. 김인철 씨 제공

접이식 밀차에 책을 가득 싣고 나자, 사장이 말했다.

“자, 이제는 이걸 택배 기사에게 끌고 가라.”

“네?”

42세 늦깎이 신입사원 김인철 씨는 당황했다. 택배 기사가 물건을 받아가는 대로변 약속 장소까지 가려면 번화가인 서울 명동거리를 가로질러 가야 했다. 북한에서 무역일꾼도 했고, 학생들도 가르쳐봤던 그는 허름한 작업복 차림에 밀차를 끌고 인파 가득한 명동거리를 다닌다는 게 부끄러웠다. 그러나 달리 방법이 없었다.

삼복더위에 온몸은 땀으로 젖었다. 거리를 가득 메운 외국인 관광객들이 자기만 바라보는 것 같았다. 머리를 푹 숙인 채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이렇게 살려고 한국에 왔나’는 자괴감이 계속 들었다. 그때마다 그는 다시 이를 꽉 깨물었다.

‘이젠 더 물러설 곳도, 도망갈 곳도 없다. 창피함을 버려야 돈을 번다.’

2014년 여름 그는 그렇게 명동거리를 수없이 오갔다. 6년 뒤인 2020년 김 씨는 매출액 25억 원을 기록한 인쇄업체 사장으로 거듭났다.

# 탈북

김 씨는 1972년 양강도 혜산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에서 압록강까지는 불과 50m 정도 거리였다. 어린 시절 그는 압록강에 나가 수영을 했고, 팬티 바람으로 맞은편 중국 창바이(長白) 현 시장에 가서 돌아다녔다. 그 시절에는 국경경비대도 없었다. 1987년에야 군인들이 혜산에 들어왔지만, 압록강에서 노는 것을 막지는 않았다.

겨울엔 중국 아이들과 압록강 얼음판에서 만나 북한 물품과 중국 물품을 교환했다. 북한에 많은 명태 20마리를 주면 중국제 포커카드 한 세트와 바꿀 수 있었다. 비누, 다리미, 가위까지 압록강 위에서 온갖 물품이 오갔다.

혜산식료공장 지배인을 부친으로 둔 김 씨는 수재학교인 혜산외국어학원을 졸업했다. 이후 1994년 김정숙사범대학 영어과도 졸업한 뒤 실습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쳐보니 교사는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는 뇌물을 주고 교사 임용을 거부하고 혜산시 보안서(경찰) 소속 수출과 부원으로 옮겨갔다. 사실상 밀무역을 담당하는 자리였다.

밀무역은 잘할 자신이 있었다. 집 바로 앞에 있는, 어려서부터 뛰어놀았던 압록강 지형은 눈에 훤해 밀수에 적임자였다. 보안서 소속 신분증을 갖고 다니니 체포될 염려도 없었다.

통나무, 몰리브덴 등 닥치는 대로 중국에 넘기고 식량과 바꿨다. 10년 넘게 밀무역을 했지만 한번도 문제가 생긴 적이 없었다. 돈도 많이 벌었다.

그러나 중국을 오가며 머리 속에선 욕심이 생겨났다.

‘우리는 왜 자유가 이렇게 없는 것일까. 죽기 전에 세계를 돌아볼 수 있을까. 나는 장사가 적성에 맞는데, 북에선 자기 회사를 가질 수 없으니 억울하다.’

한국에 가고 싶은 마음이 커졌지만 탈북하다 잡히면 북에서 이룬 모든 것을 빼앗길 수 있다는 불안 때문에 선뜻 나설 수 없었다.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먼저 한국에 간 동네 친한 여인에게 전화를 했더니 “왜 아직도 거기서 그렇게 사느냐. 브로커를 소개해 줄 테니 빨리 떠나라”고 했다. 하도 독촉을 하는 바람에 그는 ‘한번 가보자’며 길을 나섰다.

브로커의 안내를 받아 2010년 6월 11일 압록강을 넘어 동남아를 거쳐 7월 16일 한국에 입국했다. 그야말로 초스피드 탈북이었다.

김 씨는 북에서 잘 사는 집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았다. 특별한 탈북 계기나 시련을 겪은 것도 아니었다. 탈북민들이 대체로 갖고 있는 눈물나는 탈북 스토리도 없다. 그냥 자유롭게 살고 싶고, 세계를 구경하고 싶고, 사업을 해보고 싶어 탈북한 거였다.

한국에 대한 첫 인상도 좋았다. 그는 “인천국제공항에 들어서자마자 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한국에 거지가 득실거린다는 선전이 거짓말인 건 알았지만 직접 오자마자 첫 인상이 너무 깨끗하고 질서정연해 놀라웠다.”

한국에 처음 왔을 때인 2012년의 김인철 씨. 김인철 씨 제공

# 방황

2011년 1월 그는 하나원을 나와 한국 사회에 첫 발을 내디뎠다. 어디 가서 뭘 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처음 시작한 일은 친구들과 함께 지방의 대기업 건설장에서 천정공사를 하는 것이었다. 김 씨는 “첫 일당이 14만 원이었는데, 내 힘으로 돈을 벌었다는 게 너무 기뻤다”고 말했다. 일당직은 일감이 없을 때도 많다. 그때면 그는 짬짬이 한국의 이곳저곳을 열심히 구경 다녔다. 그렇게 2년을 살았다.

그러나 현장 공사일은 사십 평생 육체노동을 해보지 않았던 그에게는 너무 힘들었다. 일을 못한다는 핀잔이 받았다. ‘저 친구는 일을 못하니 내일 데려오지 말라’는 면박까지 받으면서 술로 밤을 새는 날이 늘어났다.

마침 그때 탈북민 사회에서 외국으로 나가는 바람이 불었다. 그의 가슴에도 꿈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2년 동안 한국은 충분히 봤으니 선진국이란 곳에도 한번 가보자. 미국과 유럽은 어떤 세상일까. 한국에선 노가다밖에 할 일이 없는데 영어도 배운 내가 외국에 나가면 괜찮은 일자리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

2013년 12월 그는 독일로 향했다. 그의 첫 해외여행이었다.

독일에 정착하려던 꿈은 프랑크푸르트공항에 내리자마자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에게 한국의 첫 기억은 깨끗한 인천공항이었다. 선진국은 훨씬 더 발전됐을 것이란 예상과 달리 그곳은 너무 낡고 더러웠다.

이민국에 찾아가 난민 신청을 냈더니 아프리카와 동유럽에서 온 사람들과 한 방에서 기다리게 했다. 음식도 맞지 않고, 물 한잔 얻어먹기도 힘들었다. 그래도 어렵게 외국에 왔으니 유럽은 확실히 구경해보기로 결심하고 이웃 네덜란드, 벨기에 등을 돌아다녔다.

“한국 있을 때는 몰랐는데, 정작 유럽을 돌아다녀보니 한국이 최고라고 느꼈어요. 말이 통하는 내 나라이고, 깨끗하고, 인정 많고….”

그의 일탈은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결국 그는 4개월 뒤에 돌아왔다. 죽으나 사나 한국에 뿌리내려야겠다는 굳은 각오와 함께 2014년 3월 인천공항에 다시 발을 내디뎠다.

# 취업

한국에 돌아온 그는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나름 북에서 대학 졸업생이지만, 한국에 와서 쓸만한 지식이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다. 북한대학원대 석사 과정에 입학한 뒤 그는 탈북민정착지원기관인 ‘남북하나재단’에 찾아가 일자리를 찾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그곳에는 탈북민을 받겠다는 구인광고가 종종 들어온다.

마침내 전화가 왔다. 서울 충무로에서 인쇄업을 하는 실향민 2세인 나이 든 사장이었다. 그는 충무로 인쇄골목에 처음 갔을 때 인상을 잊지 못했다.

“충무로는 사람들이 뛰어다니고 있었어요. 일하는 곳이 아니라 전쟁터라는 인상을 강렬하게 받았습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 그때 새삼 느꼈습니다. 한편으론 대한민국이 이런 힘으로 일어났구나. 이 사람들이 뛰어다닐 때 나는 날아다녀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그의 첫 월급은 110만 원이었다. 한국에서 만나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은 아내에게 100만 원을 주고, 10만 원을 한달 용돈으로 버텼다. 저녁에는 대학원도 꼬박꼬박 갔다.

“대학원을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밥 한번 산 적이 없어요. 돈이 하나도 없었거든요. 그때 밥을 사준 사람들을 지금도 잊지 못해요. 이제부터 열심히 밥을 사야죠.”

어려웠던 지난날을 회상하며 김 씨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인쇄소 사장은 ‘바닥부터 기어봐야 악이 생기고, 악이 생겨야 일어난다’며 그를 혹독하게 대했다. 명동거리를 일부러 매일 밀차를 끌고 다니게 했다.

이 과정에 김 씨는 체면을 버리고, 새롭게 태어났다.

고된 일 와중에 김 씨는 인쇄업을 하나하나 배워나갔다. 그가 충무로 인쇄골목에서 버틴 이유는 110만 원 월급에 만족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의 머리 속에는 오직 ‘창업해 성공하겠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밀차를 끌고 명동거리로 나가라고 했을 때 머뭇거렸던 그는 1년 넘게 바닥을 기는 법을 배운 뒤엔 머리를 떳떳이 들고 명동거리를 밀차를 끌고 다녔다.

2015년 12월 그는 마침내 ‘지원인쇄출판사’를 세웠다. 수중에는 단돈 100만 원 뿐이었다. 그 돈으로 충무로 인쇄골목에 5평짜리 방을 얻었고, 폐기 직전의 중고 컴퓨터 2대를 샀다.

# 일감과의 전쟁

천신만고 끝에 인쇄업체를 만들었지만 일감을 따오는 것은 더 어려웠다. 인맥도, 돈도, 경력도 없는 그에게 일감을 주려는 곳은 없었다. 그렇다고 실망하진 않았다. 이미 각오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다니는 대학원에서 논문 인쇄를 첫 일감으로 얻어왔다. 두꺼운 표지의 논문을 처음 찍어냈을 때 그는 감격했다. 탈북해서 이뤄낸 첫 결과물이었다.

‘그래, 이제부터 시작하면 되지. 이렇게 일감을 따오면 돼.’

그가 처음 가서 매달린 곳은 남북하나재단이었다.

“저는 혈연, 학연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나마 아는 곳이 이곳입니다. 아버지처럼 생각하고 한번만 도와주십시오.”

직원들이 출근하기 전 정문 입구에 섰다가 명함과 판촉물을 돌리고, 다음날 또 찾아가기를 수십 번 반복했다. 그랬더니 마침내 600만 원짜리 자료집을 출판해달라는 요청이 왔다.

‘드디어 해냈구나. 수십 번 끈질기게 매달리는 게 내가 사는 유일한 방법이구나.’

두 번째로 목표로 한 거주지 구청에도 같은 방법으로 수없이 다녔다. 아쉽게도 그곳에선 지금까지도 일감을 따내진 못했다.

그러나 1년 내내 그렇게 다니니 조금씩 인쇄를 부탁하는 곳이 생겼다. 인쇄뿐만 아니라, 판촉물, 현수막 등 닥치는 대로 출판했다. 그렇게 경력이 쌓였고 마침내 이듬해인 2016년 말에 ‘통일형 예비 사회적기업’으로 선정돼 3000만 원의 사업지원비를 받았다. 그 돈으로 그는 디지털 인쇄기를 중고로 구입했다. 그게 있어야 ‘직접생산 확인증명서’를 발급받을 수 있고, 그 증명서가 있어야 조달청 입찰을 할 수 있었다.

2017년부터 그는 조달청 입찰에 수없이 뛰어들었다. 그러나 그해 그는 단 한 곳에서도 성공하지 못했다.

“입찰에 들어가면 경쟁업체들과 함께 심사위원들 앞에서 사업계획서 발표를 해야 합니다. 실적도 없는데다 북한 말투까지 듣고 나면 아예 연락이 없습니다.”

칠전팔기란 말은 그에게 사치였다. 희망이 무너지기를 수십 차례 반복했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듬해인 2018년 마침내 2억5000만 원짜리 소식지 발행 입찰을 따냈다. 실적도 많지 않은 그를 믿고 첫 일감을 준 곳은 남북하나재단이었다. 심사위원들도 ‘탈북민 1호 출판인쇄기업’이 나오는데 힘을 실어주겠다며 후한 점수를 주었다.

그날 저녁 그는 직원들과 함께 밤새 술을 마셨다. “이제 살았다”며 환호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가 또 울다가를 반복했다.

지금도 그는 입찰에 들어갈 때마다 사활을 건다. 이번에 떨어지면 고난을 함께 한 직원들을 내보내야 한다는 절박함이 온갖 모멸감과 수모를 이겨내게 해주었다.

“‘탈북민이 뭘 잘하겠어’라는 편견을 깨기 위해 살았던 것 같아요. 탈락이 이어지면서 나는 정말 이방인인가 싶어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지만, 결국 ‘어차피 우린 애초에 여기서 태어난 사람이 아닌 정착하는 사람이니까 몇 배 더 힘들어도 감내하자’고 결론내고 다음날 또 일감을 찾아다닙니다.”

기자와 만난 날에도 김 씨는 며칠 전 들어갔던 공공기관 입찰에서 떨어졌다고 스스로 자책하고 있었다. 승산이 있었는데, 갑자기 없던 마이크 울렁증 증세가 나타나는 바람에 말을 더듬어 떨어졌다는 것이다.

“사장은 일감 따오는 자리입니다. 매일 잠들기 전 ‘내일은 어디 가서, 누구를 만나 일감을 따오나’하는 생각뿐입니다. 제 얼굴은 항상 근심이 가득 차 있죠. 그러다 일감을 따오면 며칠동안 싱글벙글 얼굴이 환하게 다닙니다.”

회사에서 동료들과 사업 토론을 하고 있는 김인철 사장(왼쪽). 3년 전 사진이다. 김인철 씨 제공

# 감사한 마음

김 씨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은 인쇄된 첫 제품의 냄새를 맡고, 감촉을 느낄 때다. 회사 이름이 박힌 제품은 그에게 성취감을 안겨준다.

“북에 있을 때 제가 한국에 와서 실력있는 디자이너들과 함께 이렇게 예쁜 책을 만들거라고 상상이나 해봤겠습니까. 그런데 해보니 정말 제게 맞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전히 힘들지만, 그래도 재미있으니 버티는 것 아니겠습니까.”

열심히 사는 사람의 노력은 반드시 누군가의 눈에 띄기 마련이다. 김 씨에게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믿고 도와준 감사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중 특히 감사한 사람은 그를 충무로 인쇄골목으로 데려 온 사장이었다. 김 씨는 그를 ‘스승님’이라고 부른다. 바닥을 기는 법과 기술을 가르쳐주었다.

“제가 독립하겠다고 하자 스승님이 ‘잘 생각했다. 북한 인쇄의 질이 너무 떨어져 있는데 통일이 되면 고향에 돌아가 한국의 인쇄 기술을 전수해라. 3년 동안 뒤를 봐주겠다’고 하시더군요.”

뒤를 봐준다는 말은 기술적 문제 등을 해결해주겠다는 의미다. 실제로 그 사장은 모르는 게 있어 찾아갈 때마다 가르쳐 주었다. 2년 동안 배우고 나니 물어보려 더 찾아갈 일이 없어졌다. 대신 김 씨는 명절마다 스승님의 집을 찾아가 인사를 드린다고 했다.

스승님의 영향으로 그는 꿈이 생겼다. 통일된 뒤 북한에 돌아가 만화책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멋진 책들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것이 탈북민 1호 인쇄업자가 당연하게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다니던 김포의 한 교회 목사도 감사한 사람이다.

“인쇄업을 처음 시작했을 때 얼마나 미숙했겠습니까. 지금 제가 봐도 줄 간격이나 오자 등이 훤히 보였죠. 하지만 목사님은 늘 교회에서 ‘우리 김인철 사장이 최고다’고 칭찬하면서 꼭 성공할거라고 자신감을 심어줬죠.”

맨 주먹으로 시작한 그에게 뭐 하나라도 일감을 맡겨 주려고 애를 써준 남북하나재단 직원들도 너무나 감사한 사람들이다. 아무 인맥도 없는 한국 사회에서 첫 발을 내딛기까지 그들의 도움은 큰 힘이 됐다. 첫 입찰 심사를 통과했을 때 자기 일처럼 기뻐해준 사람들이다.

그런 격려에 힘입어 한 발 한 발 걸어온 결과 김 씨의 ‘지원인쇄출판사’는 매년 성장했다. 직원도 9명으로 늘었다. 이중 4명이 탈북민이다.

지난해 매출 10억 원을 달성했고, 올해는 25억 원을 달성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대다수 기관들이 인쇄 예산을 방역 예산으로 바꿔 인쇄업이 크게 위축된 상황에서 거둔 성과다.

“코로나 사태로 비대면 서비스가 확장돼 배달이 늘고, 박스 수요가 많아졌습니다. 우리도 요즘 박스 생산 쪽으로 많이 공략하고 있죠.”

김인철 사장이 회사 공장에서 새 인쇄물 제작 작업을 하고 있다. 김인철 씨 제공.

# ‘한국은 살만한 세상.’

김 씨의 인쇄소에는 정직원 말고도 하나원을 갓 졸업한 탈북민 10여명이 찾아와 인턴을 한다. 그들은 그의 성공 비결을 들려달라고 요청하곤 한다. 그때마다 김 씨는 “한국은 정말 살만한 세상이며 자유를 누리려면 노력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가 한국에 막 정착한 탈북민에게 해주는 말은 크게 4가지다.

첫째는 한국에서 적성부터 빨리 찾으라는 것이다. 적성에 맞는 일을 잡아야 오래 할 수 있고 성공할 수 있다는 뜻이다. 둘째는 사업을 하려면 꼭 밑천으로 먼저 몇 천 만원을 모아놓고 시작하라는 것이다. 단돈 100만 원으로 시작해 너무 힘들었던 자신의 경험이 우러나오는 조언이다. 셋째는 노력이다. 힘든 만큼 노력이 돌아올 수 있는 사회가 이곳이기 때문에 실패해도 좌절하지 말고 일어나라고 말해준다. 넷째는 정직함이다. 김 씨는 “정직함은 얼굴에 만들어낼 수 없다. 그것은 자기가 스스로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아직 김 씨는 자신이 성공했다고 보지 않는다. 지금도 한국에 뿌리를 내리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인쇄소 매출을 100억 정도 올리면 좋겠지만, 그건 꿈일 뿐이다. 당면한 목표는 몇 년 전부터 계속 노력하지만 아직까지 이루지 못한 대기업 사옥에 복사점 내는 일을 올해 안에 성공시키고 싶다.

김 씨를 한국으로 이끌어온 꿈-세계 여행은 아직 그의 머리 속에 자리 잡을 틈이 없다.

그는 지금도 김포의 임대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지금까지 번 돈을 계속 설비에 투자했기 때문이다. 하남지식산업센터에 100평짜리 인쇄 시설도 갖추고 각종 기계도 갖췄지만, 아내에게 아직 반지 하나 사주지 못했다.

김 씨는 아침마다 김포 집을 나와 올림픽대로를 따라 1시간30분~2시간을 운전해 하남 공장으로 간다. 출근시간대에 꽉 막혀있는 올림픽대로 어느 차 안에는 때론 근심 가득한 표정을, 때론 환한 표정을 하고 앉아있는 양강도 혜산에서 온 이 남자도 끼어있다. 압록강에서 뛰어놀며 성장한 그는 이제 한강을 오르내리며 뿌리를 내리고 있다.
   
나현 11/25 17:02 수정 삭제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오늘도 땀 흘리는 김인철 사장님,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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