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 물든 12호 정치범수용소 정치범 집단 폭동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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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하 2021.01.18 10:20

북한 체제를 지탱하는 양대축은 세뇌와 유례를 찾기 힘든 연좌제에 기초한 처벌입니다. 삼엄한 감시를 통해 불만을 가진 자들을 색출해내고, 북한 체제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있으면 당사자는 죽이고 가족들 정치범수용소에 끌고 갑니다. 이런 공포 속에서 사람들은 감히 저항할 생각을 못합니다.

그런데 북한 역사에서 폭동이 일어났던 단 하나의 예외가 있었습니다. 그것도 가장 가혹한 처벌과 감시가 일상화된 정치범수용소에서 수감자들이 30~40명의 보위원들을 죽이고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어차피 죽을 운명이기 때문에, 죽음을 각오한 수감자들은 목숨을 던지며 저항했고, 또 그들 모두는 참혹하게 학살됐습니다. 500명 이상이 학살된 창평 수용소 폭동의 진실을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폭동은 34년 전인 1987년 5월에 일어난 일인데, 오래전 일을 왜 꺼내는가 하실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창평 12호 정치범수용소의 유혈봉기와 대학살은 세상 사람들이 거의 모릅니다. 또 세상에 극히 일부 알려진 것도 진실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주성하TV는 정확한 내용을 조사해 여러분들께 말씀드리기 때문에 역사에 폭동의 기록을 영상으로 남기려는 의도도 있습니다. 북한이라는 흑막 속에서 벌어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사건, 이제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주성하TV는 구독 좋아요도 좋지만, 끝까지 봐주시면 더욱 힘을 얻습니다.

폭동이 일어난 창평정치범수용소는 북한에선 12호 관리소라고 불렀습니다. 위치는 북한의 최북단인 함경북도 온성군에 위치해 있습니다. 회령도 그렇지만 인근 창평 수용소도 탄광과 농산반 등을 갖고 있습니다.

정치범들이 많으니 탄광마을, 농산마을 이런 식으로 분리가 돼 있는데 폭동이 있어난 곳은 약 500여명이 일하는 탄광이었습니다. 정치범 중에서 힘을 쓰는 40대 미만이 주로 탄광에서 일하고 노약자는 농장에서 일하는데, 정치범들은 결혼을 거의 못하니 단체로 돼지우리 같은 곳에서 살며 노역에 동원됩니다.

폭동 내막은 이곳에서 경비병으로 있었던 안명철 ‘엔케이워치’ 대표를 통해 들었습니다. 그는 1987년 8월에 이 부대에 신병으로 갔는데 그때까지 시신을 소각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고, 그의 분대장 등 고참 대원들이 불과 3개월 전에 일어난 폭동에 대해 자세히 말해주었다고 합니다.

폭동의 계기는 탄광에서 일하던 한 정치범이 보위원으로부터 심하게 구타를 당하다가 반항해 그를 때려눕히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자 보위원이 총을 꺼내 그 정치범을 현장에서 사살했고, 주변에서 이를 목격하고 분노한 다른 사람들이 다시 달라붙어 보위원들을 죽인 사건입니다.

현장에서 보위원을 때려죽인 이상 이들을 살려두겠습니까. 흥분한 정치범들은 “어차피 죽을 것이니 복수라도 하고 죽자”며 고개 하나 넘어 있는 보위원 사택마을을 들이쳤습니다. 그리고 닥치는 대로 죽였습니다.

뒤늦게 경비대가 출동해 정치범들을 사살하기 시작했습니다. 안 대표의 증언에 따르면 AK47 소총의 탄약이 바닥이 나서 대공진지를 지키던 14.5미리 고사기관총을 가져다 사격했다고 합니다. 창평 골짜기에선 하루 종일 총성이 울렸습니다. 그리고 달아난 정치범들을 사냥하듯 따라다니며 죽였습니다.

이 폭동으로 탄광에서 일하던 정치범 500여명이 학살됐습니다. 위키백과에는 5000명이라고 알려졌지만 그 정도는 아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보위원 가족 마을에선 노인과 아녀자들을 포함해 200여명이 정치범들에게 죽었습니다. 이중 죽은 보위원 숫자는 30~40명 정도라고 안 대표는 증언했습니다. 보위원과 보위원 가족은 수용소 울타리 밖에 공동묘지를 만들어 묻었습니다.

이 폭동으로 창평 수용소는 얼마 뒤 폐쇄돼 이곳에 남은 몇 만 명의 정치범들은 다른 수용소로 분산 수감됐습니다. 수용소 자리는 4.25담배농장이 들어서서 군인들 집단 제대시켜 일하게 했습니다.

저는 안타까운 게 정치범들이 왜 탈출하지 못하고 수용소 울타리 안에서 참혹한 죽음을 맞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창평엔 저도 가봤지만, 산을 타고 한 시간만 가도 두만강이 나오고 중국에 바로 갈 수 있습니다. 그땐 국경경비대도 거의 없었습니다.

당시엔 중국도 주민 파악 시스템이 허술해서, 더러는 체포돼 북송되겠지만 그래도 일부는 숨어살 수 있었을 겁니다. 이에 대해 안 대표는 그들이 지리를 몰랐기 때문에 도망가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루아침에 체포해 밖이 보이지 않는 호송차에 실려 수용소에 들어오다 보니 자기들이 두만강 옆에 있는지, 아님 강원도 산골에 있는지 전혀 모른다는 겁니다. 자기 위치를 모르면 방향을 잡아 탈출할 수가 없는 겁니다. 정말 안타깝죠.

지금은 두만강 옆 정치범수용소에서 이런 폭동이 일어나면 사람들이 중국으로 탈출할 겁니다. 최근 20년 안에 끌려간 사람들은 대량탈북 시대를 거치며 중국으로 탈북할 수 있고, 한국도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북한은 12호 수용소는 물론 두만강 옆 회령에 있던 22호 정치범수용소도 없애고, 정치범수용소들을 내륙으로 모두 통폐합시켜 5개만 남겨두었습니다. 여전히 20만 명으로 추산되는 정치범들이 짐승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창평 12호 정치범수용소의 폭동은 인간은 마냥 밟혀만 살 수 없다는 교훈을 남겨주었습니다. 사라졌지만 잊어서는 안 되는 정치범들과 희생자들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