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청년들을 휩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열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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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하 2021.03.09 11:11

오늘은 북한에서 불었던 최초의 미국 열풍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북한 사람들은 미국인들에 대해 오랫동안 ‘미제 침략자’ ‘미제 승냥이’라고 배워왔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오랫동안 북한에는 미국 문화라는 것이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썩고 병든 자본주의 문화의 온상이 미국이라는데 당연하죠.

우리가 한민족이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 게 바로 이런 대목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할리우드 문화권에서 자랐기 때문에 미국 사람과 영화나 문학 등을 이야기하면 잘 통합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과 북한 사람이 예술에 관해 이야기하면 전혀 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북한 사람들은 같은 사회주의 문학권인 중국이나 러시아 문학에 대해 더 잘 압니다.

그래서 문화적 코드를 따지면 남북이 더 가까운 것이 아니라, 미국과 한국을 한편으로 북한과 중국, 러시아가 한편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말만 같지 문화적 코드가 다르고, 오히려 한국인은 미국인과 더 정서적 동질감을 더 느끼게 되는 거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미국 하면 치를 떨던 북한에서 1999년부터 시작해 2000년대 초반까지 갑자기 미국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열풍이 불었습니다.

김정일이 글쎄 “이제 우리 청년들도 미국 소설을 읽을 때가 됐습니다”고 한 것인데, 당시는 김정일이 미국과의 수교에 많이 다가갔을 때입니다. 맨날 욕하던 미국과 외교관계 맺는 것에 대해 부담감이 있으니 소설부터 출판한 겁니다. 그래서 당시 미국 소설이 제가 알긴 북한 역사상 최초로 딱 두 권 출판됐습니다.

바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미국의 비극’이라는 소설이 출판됐습니다. 미국의 비극은 1920년대를 배경으로 가난한 청년이 상류사회 진출을 위해 애인을 죽이고 자기도 죽는 그런 내용인데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비해선 크게 인기를 얻지 못했습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사실 김정일이 지시하기 전에도 북에 100부 도서라고 존재하긴 했습니다. 북한에서 딱 100부만 찍었다는 것인데, 이건 엄격한 승인을 받아야 봅니다.

그런데 영화는 더 일찍 들어왔습니다. 제가 김대 영문과를 다닐 때 청취 기말시험이 이 영화였습니다. 한 학기 내내 이 영화만 지겹게 봤는데, 가뜩이나 뭔 소리 하는지 들리지도 않는데다 옛날 영화라 저는 뭐 감동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사실인지 모르겠지만, 들으니 이 영화 테이프를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1994년 김일성과 면담할 때 선물로 준 것이라고 합니다. 일반에 공개된 것은 아니고, 김일성대나 외대 전공과에게만 특별히 허용된 정도였습니다.

1990년대 중후반에 이 영화뿐만 아니라 사람들 속에서 ‘타이타닉’ ‘다이하드’ 이런 미국 할리우드 영화는 많이 돌았습니다. 이후에 1990년대 후반에 미국 대표단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원작 소설을 선물로 갖고 왔습니다.

김정일이 지시로 외국문출판사에서 1999년 1월인가 1부가, 2000년 초에 2권이 나왔는데, 솔직히 번역 수준은 북한이 한국보다 절대 떨어지지 않습니다.

한국은 영어 좀 하면 번역을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북한은 작가 수준의 번역가들이 속도 제한 없이 하루 1~2페이지라도 꼼꼼하게 번역하니 읽을 맛이 납니다. 제가 북에서 읽었던 고전들을 한국에 와서 다시 읽으려니 번역 수준들이 너무 떨어지더라고요. 대신 북한은 100개 남짓한 명작만 골라 번역해 책으로 냈기에 다양화란 측면에선 형편이 없이 떨어집니다.

아무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번역돼 나오자마자 엄청난 열풍이 불었습니다. 평양 젊은이들은 이걸 안 읽으면 대화가 되지 않는 수준이었습니다. 이 책의 구절을 이야기하고, 서로 이 책의 소감과 명문을 주고받으며 연애하는 건 너무 일상적인 장면이 됐습니다. 이걸 통해 지적 허영을 충족하고 확인했던 것 같습니다.

이 책을 읽었냐에 따라 문명의 척도도 달라졌는데, 적어도 평양 4년제 대학 다닌 친구들은 거의 다 읽었을 겁니다. 물론 지방이나 전문대는 그 정도 열풍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도서관에 가서 빌리려면 재고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책 종이가 까만 종이라 열댓 명만 읽으면 보풀이 일어서 굴자가 없어지기도 하는데, 장사꾼들이 재빨리 복사해 장마당에서 팔았습니다. 책 1권 값이 쌀 2㎏ 정도 가격이었는데 이 정도면 되게 비싼 책입니다.

대학생들은 밑줄을 그어가며 수첩에 명문을 적었습니다. 한국책을 베꼈는지 그 유명한 “Tomorrow is another day”는 북한도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거야”라고 번역했습니다.

스칼렛 오하라와 레트 버틀러는 엄청 유명해졌죠. 그래서 아마 미국인들이 북에 가면 뭔 얘기해도 뭔 소리인지 뚱해하다가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타이타닉 이야기하면 그들도 눈이 반짝반짝해질 겁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물론 명작이긴 하지만, 북한 젊은이들이 얼마나 미국의 문화에 목말랐으면 역사도 잘 모르는 미국 과거 배경의 소설에 이토록 열광했겠습니까. 그 열풍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김정일의 변심으로 미국 소설 딱 두 개로 끝났습니다. 물론 이후 할리우드 영화는 그럭저럭 많이 들어갔습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열풍은 미국인들을 승냥이라고 반세기 훨씬 넘게 세뇌된 북한 주민들도 미국의 문화를 정작 접하게 되면 완전히 빠져들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 날이 오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북한의 독재정권이 바람과 함께 사라져야 가능할 것입니다. 어쩌면 그것이 북한 청년들의 책에서 찾으려 했던 진짜 메시지가 아닌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