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회고록 최초 입수. 동생의 죽음에 대한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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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하 2021.03.17 17:46

오늘은 제가 최초로 입수한 ‘김정일회고록’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아직 세상에는 김일성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만 알려졌는데, 김정일도 회고록을 작성했습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아직 비공개로 남아있습니다.

저는 김정일이 2002년 4월 15일 김일성생일 90주년을 맞아 작성한 회고록 파일을 단독으로 입수했습니다. 사실 북한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겐 굉장히 귀한 자료일지도 모릅니다.

원고지 2200매 분량으로 책 두 권이 나올 수 있는 분량인데, 이 회고록은 김일성 생일을 맞아 작성한 것이어서 김정일이 자라며 지켜본 김일성에 대한 회상이 위주로 돼 있습니다.

주로 김일성이 만난 사람들에 대한 회고담이 태반인데, 수백 명의 인물이 언급돼 있습니다. 내용은 한결같이 김일성 찬양이라 뻔한 내용이긴 하지만, 임수경, 문익환, 이후락 등 김일성이 만난 한국의 인물들도 언급돼 있습니다. 뭐 이 내용이 김정일이 직접 썼겠습니까. 김정일이 한 이야기를 당역사연구소 사람들이 정리한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오래 지나다보니 내용이 유출된 것입니다.

우리의 회고록처럼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한국의 정치인은 아무리 뻔뻔해도 잘못한 점도 적지만 김 씨 일가 외엔 회고록 쓸 수가 없고, 그것도 참회하는 내용은 절대 없고, 죽을 때까지 자기 자랑한다는 점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김정일 회고록 중에서 성시백 대목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성시백은 해방 이후 김일성의 지시를 받고 한국에 침투해 공작하다가 6.25전쟁 발발 다음날 처형됐습니다. 북한에서 최고의 대남공작원으로 추앙받고 있고, 제1호 공화국영웅이 됐으며 그를 주인공으로 한 ‘붉은 단풍잎’이란 7부작 영화도 나왔습니다.

성시백에 대한 자료는 서울에도 비교적 많이 알려져 있는데, 혹 공개 안 된 내용도 있을 수 있으니 역사학자들에게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내용은 회고록 중 ‘만나야한다1’이란 소제목에 실려 있는데, 흥미로운 것은 김일성과 성시백이 만난 날에 김정일의 동생 슈라가 죽었답니다. 이제부터 모든 내용은 아니고 필요한 대목만 발췌해 읽는데, 북한 표기법 그대로 자막을 쓰겠습니다.


“1948년 여름, 우리 집에는 예상치 않은 가정적 비극까지 겹쳐들었다. 어린 내 동생이 정원에서 놀다가 못에 빠져 숨을 거두었다.
때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부관과 경위대원들이 어머님과 함께 사색이 되여 돌아갔다.
그날 수령님께서는 남조선혁명가 성시백과 함께 나라의 통일문제와 관련된 중요한 담화를 나누고 계시였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는 언제 나오시나 하고 수령님께서 계시는 방 쪽만 바라보았다. 아버지를 위해서도 어머니를 위해서도 그리고 나를 위해서도 있어서는 안 될 그런 엄청난 비극이 생기였다는 생각에 속이 조마조마해 지기만 했다. 사고의 전말을 알려드리려고 어머님께서 들어갔다 나오신 다음에도 수령님께서는 웬일인지 밖으로 나오지 않으시였다.
이상한 일이였다.
나는 그 까닭을 알 수 없어 어머님을 찬찬히 올려다보았다. 어머님의 눈은 눈물에 젖어 벌겋게 짓물려 있었다. 어머님은 나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며 “저리 가 있거라” 했을 뿐 다른 말씀을 더 안 하시였다.
수령님께서 밖으로 나오신 것은 그때로부터 퍼그나 시간이 흘러간 다음이였다. 성시백은 그제야 우리 가정에 어떤 불상사가 생겼는가를 깨닫고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수령님의 손을 부여잡았다.
“장군님,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저 같은 게 뭐라고. 아, 세상에! …”
“성 선생, 이러지 마십시오. 내 한가정의 불행이 아무리 큰들 민족이 처한 분렬의 위기에 비기겠습니까. 놀라게 해드려 안됐습니다.”
성시백은 불상사를 당하신 장군님께 위로 한마디 못해 드린 이 못난이를 도리여 위로하십니까, 예? 하며 목 메여 부르짖었다.
“제 기어이 민족분렬을 막고 장군님을 서울에 모시는 것으로 오늘 못한 위로를 다 해드리겠습니다. 제 오늘에야 남북을 하나로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절박한 중대사이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자기를 바친다는게 무엇인가를 똑똑히 깨달았습니다.”
그는 비장한 각오를 안고 남조선으로 떠나갔다.

자 이제부터는 김구 여운형을 언급한 대목은 빼고 다음 대목 읽겠습니다.

6.25전쟁을 한달 앞둔 어느 날 수령님께서는 성시백이 체포되였다는 비보를 받으시였다.
성시백은 조국의 통일과 남조선혁명을 위해 자기를 다 바친 로숙하고 세련된 혁명가였다. 그는 수령님과 남조선의 애국인사들을 련결시켜주는데서 중요한 안전대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4월 남북련석회의때 김구, 김규식의 북행길을 성사시킨 주인공도 사실은 성시백이였다.
수령님께서는 그를 구출하기 위한 긴급조치로 남측에 우선 38선의 우리측 초소에서 담판을 하자고 제기하도록 하시였다. 그러나 북침전쟁을 눈앞에 둔 남측은 그 제의에 침묵으로 대답하였다.
수령님께서는 전쟁이 일어나 서울해방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성시백을 비롯한 남조선혁명가들을 한사람도 빠짐없이 구출할데 대한 명령을 하달하시였다.
6월 28일 아침 명령을 받은 특수조는 서울에 선참으로 돌입하여 륙군형무소, 서대문형무소의 독감방들과 륙군특무대의 헌병지하고문장들 지어 총살당한 애국자들의 시체더미까지 샅샅이 훑기 시작하였다. 최고사령부 무전실과 서울 특수조사이에는 즉시로 무전 곁속이 이루어졌다.
수령님께서는 성시백의 소식부터 물으시였다. 특수조는 적들이 서울 전투 전날 불의에 성시백의 사형을 집행하였다고 보고하였다.
“그럼 시체라도 찾소, 시체라도!”
“장군님, 놈들은 그의 시신까지 없애버렸습니다.”
수령님께서는 억이 막힌 표정으로 앉아 계시였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가 살아 있다는 통보를 받고 이제 조금만 진공속도를 높이면 구원할 수 있겠구나 하고 말씀하던 수령님이시였다. 그처럼 귀하게 여기던 혁명동지를 잃고 시신조차 묻어 주지 못하게 되였으니 그이의 심중이 오죽하셨겠는가.
수령님의 명령에 따라 평양과 서울에서는 고 성시백을 추모하는 추도식이 엄숙히 거행되였다.
성시백은 얼마든지 제 한목숨을 살리고 영웅이 되여 공화국의 품으로 찾아 올수 있었던 사람이였다. 그가 박헌영 도당의 밀고로 남조선합동수사본부의 집중수배에 걸려들었다는 통보를 받은 수령님께서는 수일 내에 급히 북으로 피신해 들어오라는 련락을 보내시였다. 그러나 그는 체포되는 마지막수간까지 위험한 전구를 떠나지 않았다. 륙군형무소에 감금된 성시백은 안해에게 이런 부탁을 남기였다.
“통일이 되면 내대신 장군님을 꼭 찾아 가주오. 장군님을 만나 뵈오면 내가 장군님의 만수무강을 축원하며 갔다고 전해 주오.…그러지 않아도 아픔 많으신 그이를 내가 또 아프게 하며 가게 되다니.…”
전쟁이 일어난 그해 여름에 수령님께서는 서울과 수안보를 다녀오면서 그처럼 그리던 남반부인민들을 처음으로 만나시였다. 그이께서는 서울에 나가는 길로 전선사령부에 잠간 들렸다가 빈민들이 모여 사는 청계천기슭의 주택 지구부터 찾아 인민들의 생활형편을 료해하시였다. 그해 7월말에는 다시 서울에 나가 새 사회건설에 떨쳐나선 시민들을 고무해주기도 하시였다.
그때 남녘땅에 가서 만난 하나하나의 얼굴들은 수령님의 가슴속에 지울 수 없는 한생의 추억으로 깊이 간직되였다. 수령님께서 남조선의 로동자, 농민들을 만나보신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였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김정일의 동생이 연못에 빠져 죽었다는 내용은 한번도 북한 인민들에게 공개된 적이 없는데, 회고록에는 실으려 했던 모양입니다. 김일성이 6.25때 서울에 두 번 왔군요. 제가 일하는 여기 청계천에도 왔다 갔다고 언급됐는데, 저도 이건 처음 알았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김일성이 만난 문익환, 그리고 임수경에 대한 대목을 읽어드리겠습니다.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