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회고록에 실린 임수경 방북 사건 관련 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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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하 2021.03.27 18:26

지금까지 2회 공개했던 ‘김정일회고록’에 등장한 한국 인물들 중 오늘은 임수경 관련 내용을 공개하겠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북한의 말은 원래 믿을 수가 없고, 김정일 회고록도 사기가 가득 차 있으니 이것이 완전히 진실이라 단정할 수 없다는 점 감안하고 들어주십시오. 북한이 임수경 방북 사건을 김 씨 일가 우상화에 어떻게 이용하고 있는지 참고할 수는 있습니다.

혹시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임수경에 대한 이미지가 미화됐다고 생각되시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이건 제 견해가 아니라 김정일 회고록에 나오는 내용을 제가 전달할 뿐이라는 점 감안해서 저에게 화를 내진 마십시오.

이번 내용은 회고록의 3분의 2쯤 지나 나오는 ‘만나야한다1’이란 소제목에 실려 있는데, 문익환 목사 언급한 뒤 이어 임수경 관련 내용이 나옵니다. 북한 표기법, 띄어쓰기 그대로 올리겠는데 좀 길다는 점 미리 감안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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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돌파구를 타고 석달만에 림수경이라는 22살의 처녀대학생이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희(전대협)의 100만 학도를 대표하여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려고 평양으로 찾아 왔다.
그의 도착장면을 나도 텔레비죤으로 보았는데 정말 눈물없이는 볼수 없는 광경이였다.
전대협대표가 도착했다는 방송차의 방송을 듣고 수십만의 평양시민들과 청년들이 거리로 쓸어나와 림수경을 환영하였다. 얼마나 많은 인파가 밀려 들어 림수경의 손을 잡아 보려고 싱갱이질을 했던지 교통안전원들도 도저히 질서를 잡을수가 없었다.
상봉의 열광과 감격으로 뒤엉키고 설레이는 혼잡, 이것이 남녘의 사절을 맞아 리성마저 잃은듯 한 북녘의 아버지, 어머니들과 형제자매들의 례절이고 질서였다. 그것은 분단 50년력사에서 처음 보는 눈물의 바다,웃음의 바다였다.
비행장으로부터 고려호텔까지의 긴 연도에서 벌써 국빈보다 더 성대하고 열렬한 환영을 받은 림수경, 그가 지나가는 곳마다에서 끊임없이 일어 나는 환성과 박수갈채 ! 무엇이 우리 인민으로 하여금 이 애어린 처녀를 그처럼 열광적으로 맞이하게 하였던가. 그가 평양에 온다고 해서 통일이 당장 되기라도 하는가. 아니였다. 그것은 헤여져 반세기동안 한번도 만나보지 못한 남녘의 형제들에 대한 그리움의 폭발이였다.
얼마나 많은 환영군중이 잡아 보고 쓸어 보고 당겨 보고 했던지 림수경의 손목은 부르트다 못해 피멍까지 들었다.
나는 곧 대학생대표 여러명을 붙여주어 림수경의 호위도 하고 말동무도 하게 하였다. 신변을 지켜 주기 위한 호위가 아니라 군중의 《성화》를 막아 주는 호위였다. 세상에 아마 이런 호위는 없을것이다.
그렇게도 만나보고 싶던 이북형제들이였지만 림수경은 너무도 격하게 밀려 드는 군중의 파도를 더는 감당할수 없어 자주 남학생차림으로 위장하거나 인적이 드문 곳으로 피해 다니지 않으면 안되였다. 반공을 그무슨 필수영양소처럼 섭취하며 자란 림수경이 그 자그마한 몸으로 분단의 장벽에 구멍을 내고 공화국북반부로 용감하게 찾아 온것은 온 민족의 축복을 받을만 한 경사였다. 우리 인민들은 누구나 그 용기에 탄복하였다.
림수경은 북에 와있는 기간 전대협조직이 강조한 준칙대로 처신을 잘하였다.
그가 전대협으로부터 받은 과업은 남조선전대협대표로서 자기 존엄을 지키고 철저히 자률적으로 행동하라는것, 북과 남의 어느 한쪽에 치우쳐 찬양하거나 비방하지 말라는것, 어떤 일이 있어도 판문점을 통해 귀환하라는것이였다.
국제평화대행진대성원들의 분계선강행통과를 위한 판문점행사를 치를 때도 림수경은 앞가슴에 태극기를 붙이고 판문각에 나타나 안내하는 일군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나에게 그 사실을 보고한 일군은 림수경이 앞가슴에 태극기를 붙이고 나타났을 때 몹시 당황했다고 솔직하게 고백하였다.
나는 대뜸 그에게 태극기가 그렇게도 무섭던가고 물었다. 태극기가 그렇게 무서우면 대한민국정부와는 어떻게 서로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하겠는가고 하였다.
나는 이렇게 오금을 박았다.
《수경이를 탓할건 하나도 없소. 그는 남조선전대협의 존엄을 지키고 그 조직대표의 본분을 다하려고 했을뿐이요. 그를<적화> 하려고 해서는 안되오 》
수령님께서는 림수경이 전대협대표로서의 존엄과 자립성을 끝까지 지켜 주려고 여러모로 마음 쓰시였다. 림수경과 관련한 일체 행사들은 다 본인의 요구와 희망대로 일정을 짜도록 하게 하시였다.
림수경은 우리 대학생들과 어울려 다니며 조금도 구김살없이 행동하였다.
우리 인민들은 림수경이 평양에 도착한 첫 순간부터 수령님께서 그를 단독으로 만나주실거라고 예측하였다. 그러나 그 예측은 맞아 떨어지지 않았다. 수령님께서 림수경을 만나신것은 평양축전에 참가한 국내외의 대표들과 자리를 같이한 금수산의사당의 연회장에서뿐이였다. 대표들과 차례로 축배잔을 찧다가 림수경과도 잔을 찧으셨는데 그것이 전부였다. 5분도 되나마나한 짧은 순간이였다. 그이께서 림수경을 가리켜 《통일의 꽃》이라고 불러 주신것이 바로 그 상면때의 일이다.
림수경이 체류일정을 마치고 판문점을 거쳐 남조선으로 돌아갈때 수령님께서는 그가 혹시 무슨 불상사라도 당하지 않겠나 하여 몹시 마음쓰시였다. 제3국을 거쳐 남조선으로 돌아간 문익환이 철창속으로 끌려 간지 얼마 안되는 때여서 더 불안해 하시는것 같았다. 안기부가 무슨 트집을 잡아서든지 수경이를 감옥에 잡아 가두겠는데 어린 처녀가 그 모진고초를 어떻게 이겨 내겠는지 모르겠다고 몇번이고 말씀하시는 수령님의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분단의 깊이가 얼마나 깊은가를 새삼스럽게 절감하였다.
수령님께서는 나에게 암만해도 림수경이를 제3국을 통해 내보내야 할것 같다고 하면서 그가 생각을 돌리도록 잘 설복해 보라고 하시였다. 나는 일군들을 시켜 림수경학생의 용단을 높이 평가하고 나서 그가 자기 행동을 심중히 고려하도록 여러 모로 설복하게 하였다.
그러나 림수경은 막무가내였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판문점의 분리선을 기어이 제발로 끊어 놓겠다는것이였다.
나의 보고를 받은 수령님께서는 지금 수경이의 앞에는 분계선이라는 존재가 없다. 장벽도 헤치면 문이 생기는 법이고 수풀도 누가 먼저 걸어나가면 길이 생기는 법이다. 여태 막혀 있던 분계선도 뚫고 나가면 열리기 마련이다. 통일의 그 첫 발자국을 찍으려고 결심한 림수경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장한 딸이고 통일의 꽃이다. 그러나 그 무거운 력사적과제를 손녀딸 같은 어린것한테다 맡긴다는것은 차마 못할짓이다. 요즘 저쪽에서는 림수경의 평양방문을 도와 준 녀대학생들을 잡아 가두고 수경이의 평양방문과 관련하여 여러가지 탄압구실을 계속 만들어 내고있다고 한다. 넘어 가면 틀림없이 악형을 당할것이다. 뻔히 그렇게 될것을 알면서 그냥 내보낼수는 없다. 안되겠다. 다시 더 설복해 보라고 하시였다.
우리 일군들이 설복의 도수를 높일수록 수경이의 고집도 더욱 단호해 졌다. 자기는 이미 통일의 제단에 목숨을 내걸었으니 분계선을 넘다 총에 맞아도 좋고 넘어가 잡혀가도 좋다는것이였다.
수령님께서는 일군들에게 이런 식으로 설복해 보오. 수경이가 판문점으로 해서 나가게 되면 불필요한 희생을 강요당할수 있고 북남관계를 악화시킬수도 있다. 우리가 지금 남조선측과 대화의 문을 열자고 노력하고 있으므로 대화가 실현되여 안전귀환의 길이 열린 다음에 나가는것이 좋을것 같다고 말이요. 그를 범의 아구리에 밀어 넣는 식으로 내보낼수는 없소라고 하시였다.
일군들은 김일성주석의 의사라고 하면서 다시금 림수경을 설복하였다.
그러나 림수경은 요지부동이였다. 이번에는 날자까지 찍어서 8월 15일에 무조건 판문점을 통과하겠다고 하였다. 그가 기어이 8.15에 판문점통과를 강행하겠다고 한것은 그날이 광복절날이라는 한가지 리유때문만은 아니였던것 같다. 8.15는 광복절인 동시에 성모마리아의 승천일이다.
그가 8.15에 통일을 기원하면서 판문점을 넘어가면 신의 가호를 받아 통일의 앞길도 트이고 신상에 미칠 불행도 덜수 있으리라고 믿었던것은 아니였을가.
림수경의 판문점통과를 응낙하신 수령님께서는 그 당일날인 광복절에 거의나 다른 일을 하지 못하시였다. 나에게만도 여러차례의 전화를 걸어 수경이의 판문점통과와 관련한 지시를 주시였다. 나의 서기가 수령님의 전화를 시간별로 기록한것을 보니 아침 7시에 2번, 8시에 3번, 9시에 1번, 10시에 2번, 11시에 3번 하는 식으로 하루동안 모두 합해 수십번에 달한다.
그날 수령님께서는 림수경을 돌려 보내고 나서 하나의 커다란 고역을 치르고 난것처럼 의자에 맥을 놓고 앉아 계시였다. 나를 보자 손짓으로 자리를 권하시였다.
《왜 이다지도 힘드오. 그 어린것이 무슨 죄인이요. 그가 여기 와서 한 일이란 조국통일을 웨친것뿐이고 오늘은 제나라 땅인 판문점을 거쳐 제집으로 돌아 가자는것뿐이였소. 그가 제3국으로 에돌아 가든 판문점으로 가든 그를 체포하기는 마찬가지일텐데 미군과 남조선당국이 왜 하필 3국통로보다 판문점통과를 더 기를 쓰고 막는가 하는거요. 》
나는 그들은 림수경때문에 판문점돌파의 전례가 만들어 질가봐 그러는것입니다. 군사분계선을 국경선보다 더 높이 쌓아야 한다고만 생각하는 사람들이니 그럴수밖에 없습니다. 어쨌든 수경이가 영웅은 영웅입니다하고 말씀 드리였다.
《수경이로 말하면 분계선에 통일의 첫 발자국을 남긴 녀걸이요. 그 애는 나서 첫날부터 오늘까지 남조선사회에서 배우며 자랐지만 우리 사람들과 만나자 첫 순간부터 마음이 통했거든. 수경이의 마음이자 전대협의 마음이고 남조선인민들의 마음일거요 》
림수경이 후날 남조선안기부 밀실에 같혔을 때 쓴《항소리유서》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저는 박정희정권때 국민학교를 다녔고 전두환정권때 중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반공을 국시로 하던 당시의 저는 철저하게 반공반북적인 교육을 받았고 반공글짓기대회와 그림대회에 나가기도 했습니다. 제 그림속에 등장하는 북한사람들의 얼굴은 살색이 아닌 빨간색그림물감으로 칠해졌습니다. 북한땅은 한시도 사람이 살아 갈수 없는 생지옥으로 표현되였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북한은 《사람이 살고 있는》곳이였습니다.…반공일변도의 교육을 받고 자라온 저에게는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는 자체부터가 커다란 충격이였습니다.…제 기억속에 있는 북녘형제들의 모습과 그들의 통일념원에 대해서는 그 누가 뭐라 해도 만천하에 이야기할것입니다.
림수경이 말한 그 북녘동포란 순결하고 인정많은 가슴에 끓어 번지는 통일열을 안고 사는 인민이다. 수령과 인민의 일심동체가 이루어진 우리 나라에서 수령의 인간상은 인민의 모습에 비껴 있고 인민의 인간상은 수령의 위인상에서 최고정화를 이루고 있다. 림수경의 마음속 한복판에는 자기를 통일의 꽃으로 높이 내세워 주신 수령님의 자애로운 모습이 영생의 화폭으로 남아 있을것이다.
이렇듯 장장 반세기 수령님께서 한몸의 로고를 기꺼이 바치며 고귀한 시범으로 열어 주신 상봉의 길은 통일에로 가는 대로였다.
내가 통일거리입구에 조국통일3대헌장기념비를 세울 때 단심줄형상으로 된 본래의 설계안을 서로 얼싸 안을듯 마주 달려 가 조국통일3대헌장을 함께 받쳐 든 두 녀인의 감격적인 상봉상으로 바꾸도록 한것은 그때문이다.
북과 남, 해외의 우리 겨레들은 한자리에 모여 앉을 때마다 우리가 만든 노래 《반갑습니다》,《다시 만납시다》를 눈물속에 부르고 있다. 이제 그 회합속에 북과 남이 통일의 기쁨을 함께 나눌 시각은 머지 않아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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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수경 관련 언급은 이상입니다. 숨이 차게 읽었네요. 오늘 주목되는 내용 중에 김일성이 임수경을 만난 것은 연회장에서 5분도 안된다고 강조한 내용입니다. 

한국에선 임수경이 북에 가서 김일성에게 ‘아버지’라고 했다는 내용을 두고 논란이 있었고, 조선일보가 패소해 정정보도도 했었는데, 김정일 회고록은 공개될 경우 임수경에게 이로운 쪽으로 서술됐습니다. 전대협의 자존심을 지켰다던지, 태극기를 달았다던지 등의 내용들이라 볼 수 있습니다.

평양 통일거리 입구에 세운 조국통일3대헌장기념비에 두 여인이 형상화됐는데, 이게 임수경이 모티브란 것도 저는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오늘 내용은 여기까지입니다. 역시 오랫동안 들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