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을 감히 ‘오라버니’라 불렀던 정춘실의 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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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하 2021.09.09 16:38


오늘은 북한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었던 유명한 여성, 김정일을 ‘오라버니’라고 부른 간 큰 여성, 한때 탈북설까지 나왔던 정춘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저도 북에 있을 때 정춘실이 티비에 나와서 우리 오라버니가 어쩌고저쩌고 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 여자는 얼마나 대단하길래 감히 김정일 장군님을 오라버니라고 한단 말인가. 저러고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라고 걱정했는데, 결국 그 오라버니란 말이 빌미가 돼서 고초를 겪어야 했습니다.

정춘실이 먼저 어떤 여성인지 설명드리겠습니다. 북한에선 한때 ‘정춘실운동’이란 것도 벌어져 전국이 따라 배우라고 그랬습니다. 정춘실은 자강도 진천군 상업관리소 소장을 40년 넘게 한 여성입니다. 그런데 김일성훈장 수상자, 2중 노력영웅,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불박이 등 직책에 비해 엄청나게 유명했죠.

이 여성이 뜬 것도 김일성 때문인데, 김일성이 1960년대 진천에 갔는데 한 처녀 상점 판매원이 ‘우리 가정수첩’이라는 가구별 장부를 만들어 주민들의 일상사를 꼼꼼히 챙기는 게 눈에 들었습니다. 이 수첩에는 주민들의 복장 치수와 신발 문수, 결혼·회갑 날짜, 집안 대소사 등이 적혀 있어 그때그때 필요한 상품을 공급해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여성 판매원이 훨씬 정교하게 집행하는 것이죠.

김일성은 “우리 가정수첩 공산주의상업의 싹이며, 아주 좋은 사회주의 상품공급 방법”이라고 칭찬을 했습니다. 이후 정춘실은 상업분야의 선구자로 추앙을 받았죠.

1990년대 이후 북한경제가 어려움을 겪자 김일성은 정춘실을 다시 등장시켰습니다. 국가가 줄 것이 없으니 아래 상업관리소 간부들이 해당 지역 주민들의 삶을 챙기라는 것인데, 거기에 모범으로 내세운 것이 정춘실이었습니다. 정춘실운동은 “정춘실이처럼 하라. 나라에 손을 내밀지 말라” 이게 핵심이었죠.

정춘실운동의 확산을 위해 북한은 ‘정춘실운동 모범단위’ 칭호를 제정해 우수 기관, 공장·기업소에 수여하는 한편 1994년 12월에는 평양에서 상업부문 종사자 3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정춘실운동 선구자대회’를 개최해 이 운동의 대중화를 촉구했습니다.

노동신문을 비롯한 선전매체들은 “혁명전사가 어떻게 살며 투쟁해야 하는가를 보여준 빛나는 귀감”이라며 정춘실의 모범적인 근무자세와 희생정신을 추켜세웠으며, 그를 주제로 "효녀"라는 예술영화를 제작해 배포하기도 했습니다.

그 영화를 보고 ‘실효투쟁’이라고 하는 따라 배우기 회의도 열렸습니다. 2008년에도 정춘실의 삶을 소재로 한 기록영화 ‘인생의 시작도 끝도 한 모습으로’라는 영화가 나오는 등 정춘실은 북한에서 아주 유명한 스타가 됐습니다.

정춘실이 티비에 나와 “우리 오라버니 심려를 덜어드리겠다”고 인터뷰를 하는 것도 1990년대에 자주 나왔습니다. 정춘실이 1942년 12월생인데, 김정일과 동갑이지만 10개월 늦게 태어났다고 김정일을 오라버니라고 한 것입니다. 솔직히 김정일의 입장에선 저기 촌구석 일개 상업관리소 소장이 티비에 나와 신의 자리에 앉아있는 자기를 오라버니 어쩌고 하는 것이 기분이 좋았을 수는 없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1994년엔 정춘실을 키운 김일성이 살아있을 때이고, 또 전국에 정춘실을 따라 배우라고 해놓고 숙청할 수는 없으니 기분 나쁜 대로 봐줬을 겁니다.

김일성이 죽고 결국 정춘실은 박살이 났죠. 누구한테 박살이 났냐, 바로 김정일의 누이동생 김경희한테 박살이 났습니다. 아마 정춘실에게 제일 기분 나쁜 또 다른 사람이 김경희가 아니었을까요. 북한에 김정일을 오빠라고 부를 사람은 자기 한 명이면 됐지, 촌 여자가 감히 어디다 대고 오빠라고 합니까.

그래서 정춘실 뒷조사를 했죠. 당시 북한은 고난의 행군 시절이라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할 때였습니다. 당시 자강도 책임비서가 북한이 나름 충신이라고 꼽는 연형묵이 할 때였는데, 연형묵은 총리도 지냈고 한국도 와서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연형묵은 책임비서가 모범을 보여야 한다며 꽃제비 몇 명을 자기 집에 데려와 돌보는 등 나름 간부의 모범적 자세를 보였습니다. 고난의 행군 때 자강도에서 굶어죽는 사람이 제일 많이 나왔을 겁니다. 간부들이 몇 명씩 데려다 꽃제비를 돌봐도 역부족이었죠. 도 안의 식량을 탈탈 털어도 모자랐습니다.

그런데 자강도에서 식량을 가장 많이 갖고 있던 사람이 정춘실이었습니다. 상업관리소는 넓은 땅을 가지고 옥수수를 심어 오리, 해리서 등을 키웠습니다. 오리를 길러 고기를 국가에 바치고, 해리서 털을 수출해 또 돈을 벌어오고 했고, 이것이 정춘실의 성과로 계속 보도가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연형묵이 정춘실에게 굶는 사람들 좀 주게 강냉이 좀 내놓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단칼에 거절당했죠. 정춘실도 일정한 성과를 내야 계속 평가받을 수 있으니까 연형묵 책임비서에게 “나는 장군님 지시만 듣고, 장군님께 약속한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 이런 태도를 보였습니다. 아무리 도당 책임비서라고 해도 김정일을 오라버니라고 하는 여자를 마음대로 해임할 수도 추궁할 수도 없었습니다. 책임비서가 이럴 정도니 도 상업관리소 소장은 산하 군 상업관리소 소장인 정춘실에게 허리 굽혀 설설 길 정도였습니다.

사람들이 굶어죽는데 전천군 상업관리소 가축은 강냉이를 먹고 사니 그때 자강도에 “오리가 되고 싶어요”라는 말이 유명했습니다. “우리는 풀죽, 오리는 강냉이” 이러면서 정춘실을 비난하는 여론이 우세했습니다. 그런데 정춘실을 책임비서도 어쩌지 못해요.

그래서 김경희가 나섰는데, 김경희가 자강도에 가서 사람을 만나 이런 목소리를 들었다고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실체는 정확히 알기는 어렵죠. 연형묵이 자기가 손을 댈 수가 없으니 김경희를 이용했는지, 아니면 김경희가 정춘실을 손  봐주려고 했는데 책임비서에 대한 불경죄로 엮였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어쨌든 김경희가 나섰습니다.

김경희 정도면 또 누구도 토를 달지 못하죠. 김정일도 “뒤에서 저 여자 좀 혼내주라” 했을 겁니다. 자기가 띄워놓고 직접 목을 칠 수는 없으니 김경희를 시켰을 수도 있고요. 결국 전천군 상업관리소에 중앙당 검열단이 들이닥쳤습니다.

정춘실은 “당의 신임을 믿고 기고만장해 도의 최고 간부인 도당책임비서의 말도 듣지 않고, 사람들이 굶어죽는데 자기 명예를 위해 오리에게 강냉이를 주어 당과 대중을 이간시켰고” 등의 이유로 해임됐습니다.

그런데 김경희가 정춘실을 죽이려 하니 아무리 그래도 김일성이 그렇게 띄워주고, 김정일도 그렇게 칭찬한 여자가 반동이 된다는 것은 어딜 봐도 여론이 난리가 날 것이 분명하죠. 그래서 조사실 불러다 혼을 아주 쏙 빼놓았습니다.

그 뒤로 정춘실은 완전히 기가 죽어 다시는 김정일을 오라버니라고 부르지 못했던 것은 물론 기고만장도 쏙 들어갔습니다. 정춘실이 얼이 빠지자 김경희는 이 정도면 됐다 싶었는지 말년에 정춘실은 전천군 상업관리소 명예소장으로 있었습니다.

2008년에 모 매체가 북에서 그렇게 선구자로 자리매김한 정춘실이 탈북했다고 오보를 해서 난리가 났었는데, 알아보니 오보였습니다. 정춘실은 그냥 조용히 살다가 기가 너무 빨렸는지 2015년 73세에 죽었습니다. 그래도 김정일보다는 오래 살긴 했습니다.

정춘실이 죽었을 때 김정은이 화환 하나는 보내주긴 했습니다만, 한때 북한을 풍미했던 스타의 최후라기엔 말년이 너무 쓸쓸했습니다. 이상 오늘은 감히 북한의 유일신에게 감히 오라버니라고 했다가 인생이 망가진 정춘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드렸습니다.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광호 09/14 11:06 수정 삭제
아주 자세하게 기사를 써주셔서 잘 읽고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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